[박정훈 칼럼] 모두가 대통령만 탓한다

조선일보
입력 2016.11.25 03:14

어디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일까
최씨 농단을 방조하고 침묵한 시스템의 후진성이 더 문제다
일본과 맞먹겠다 큰 소리쳤지만 우리가 선진국 되려면 멀었다
이 처연한 현실 앞에 솔직해지자

박정훈 논설위원
박정훈 논설위원

역설(逆說)이라고 할까. '최순실 스캔들'이 가져다준 순작용이 있다. 최씨 일당의 분탕질 덕에 나라의 실력을 알게 됐다. 우리는 그래도 선진국 문턱까진 온 줄 알았다. 경제력은 물론 국가 품격과 문화 수준이 개도국은 넘어섰다 믿었다. 그 믿음이 무너졌다.

비선의 사익(私益)을 위해 국가기관이 동원됐다. 청와대가 기업 돈을 뜯고 특권층의 '빽'에 입시 공정성이 무너졌다. 비선의 암약, 정권의 갈취, 특권층 '갑(甲)질'…. 이 모든 것이 후진국병(病)이다. 이 참담한 실상 앞에서도 계속 선진국 운운한다면 우리가 뻔뻔한 것이다.

지난 주말 광화문 집회에서 무릎을 친 순간이 있었다. 청년 시위대가 이런 구호를 들고 있었다.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인 줄 알았는데 고조선이었다.' 이게 정답일 것이다. 우리의 국가 운영은 '고(古)조선'으로 희화될 만큼 전근대적이었다.

모두가 대통령만 탓한다. 대통령 잘못으로 나라가 이 꼴이 됐다고 한다. 검찰에 불려간 청와대 참모들도 대통령이 시켰다 하고 있다. 맞다. 왕정(王政) 시대에 머문 듯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사태의 주범이다.

그런데 대통령 한 사람만의 문제일까. 대통령도 문제지만, 대통령을 둘러싼 국정 운영 시스템은 더 문제였다. 주변 참모들과 사정 기관, 정치 리더십과 관료 집단이 모두 엉망이었다.

어느 나라나 비선이 출몰할 수는 있다. 우리의 문제는 비정상을 감시할 경보(警報) 시스템이 고장 난 것이었다. 대통령의 궤도 이탈을 잡아줄 견제 시스템도 없었다. 대통령의 일탈(逸脫)이 후진적인 국가 시스템과 결합한 것이 지금의 사태다.

24일 오전 청와대 정문앞에서 경찰 경비대가 경비를 서고 있다. /뉴시스
24일 오전 청와대 정문앞에서 경찰 경비대가 경비를 서고 있다. /뉴시스
최씨 일당의 국정 농단은 어느 날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2년 전엔 체크될 수 있었다. 2014년 가을 파문을 일으킨 이른바 '정윤회 문건'에 최순실이 등장한다. 문건엔 '시중에선 최순실이 서열 1순위, 대통령이 3순위라 한다'고 적혀 있다.

대통령도 문건 내용을 보고받았다. 적어도 그 시점엔 박근혜 대통령도 최씨가 문제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진상 파악 대신 문건 유출만 문제 삼았다. 국정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부터 기능 장애를 일으켰다.

대통령은 40년 친분에 눈이 멀었다 치자. 이를 감시해야 할 청와대 참모와 사정 책임자들은 무얼 했나.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은 문건 유출이 "쓰레기 같다"며 엉뚱하게 '언론 보복'을 지시했다. 민정수석실과 검찰은 내시(內侍)처럼 대통령 비위만 맞췄다.

때늦은 복기(復棋)지만 최순실 문제가 체크될 경로는 숱하게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씨 딸의 승마대회 판정 시비를 감사한 것이 3년 전이다. 감사보고서에서 승마계의 최씨 파벌 문제를 지적해놓고도 대통령이 화내자 덮었다. 그 후 문체부는 최씨 일당의 민원(民願) 해결 부서로 전락했다.

최씨 딸이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한 것 역시 2년 전이다. 대학 측이 "금메달을 뽑으라"며 부정 선발을 지시해도 저항한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저항은커녕 수업을 빠져도 학점 주고 과제물까지 대신 써주었다. 이대 교수·교직원 중 최씨 딸 문제를 알 만한 사람이 수십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의 제기하지 않았다.

부정을 감시할 교육부는 거꾸로 최씨 딸을 VIP로 모신 이대에 특혜를 주었다. 특권층 앞에 공교육이 무너졌지만 교육의 감시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게 선진국인가.

교육계뿐 아니다. 야당은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고, 언론의 감시 기능도 불충분했다. 대통령을 '누님'이라 부른다며 친분을 과시하던 친박 실세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국가 시스템 전체가 장애를 일으켰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반성해야 한다. 대통령 핑계만 댈 게 아니다.

선진국에도 부정과 비리는 있다. 그러나 썩은 구석이 생기면 누군가 나타나 휘슬을 불어대는 것이 선진국이다. 우리는 최씨 일당이 휘젓고 다니는 동안 누구도 경보음을 울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무섭다고, 윗선의 지시라고 혹은 지금까지 해왔다는 관행을 이유로 부정의 향연에 동조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왔다. 일본과 맞먹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지구상에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외국인들이 놀란다. 얼마나 허망한 과대망상이었는지 알게 됐다.

최순실 사태가 벌여 놓은 이 처연한 현실 앞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대통령 한 사람만 몰아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국정 시스템에 참여하는 통치 엘리트들이 후진성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공직자·관료·정치인·교육자·언론인·기업인의 '고조선 의식'을 송두리째 고쳐야 한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공공성(公共性)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선진국이다. 우리는 갈 길이 멀었다는 사실부터 겸허하게 인정하자. 그래야 나라 꼴이 엉망진창 된 이 난리통 속에서도 다음 갈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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