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 담배꽁초다" 18년만에 살인범 잡은 집념

조선일보
입력 2016.11.22 03:00 | 수정 2016.11.22 08:51

[미제 사건 '노원 주부 성폭행 살인'… 막내였던 형사, 끝내 해결]
현장엔 체액·흐릿한 CCTV사진… 수사본부, 2년 추적에도 못 잡아

- "18년간 지갑에 범인 사진 넣고다녀"
김응희 경위, 올초 사건파일 꺼내 전과자 8000명 뽑아 혈액형 대조
잠복근무중 꽁초 주워 DNA 확인

"18년간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야 내려놓은 느낌입니다. 살인범을 너무 늦게 잡아 유족들께 죄송할 뿐입니다."

1998년 서울 노원구 가정주부 성폭행 살인사건의 범인이 체포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 사건의 범인 오모(44)씨를 구속했다고 21일 밝혔다. 영구 미제(未濟)로 남을 뻔했던 사건의 진범을 붙잡는 데는 광역수사대 소속 김응희(53) 경위가 큰 역할을 했다. 김 경위는 올해 6월 이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해 5개월 만에 범인을 잡는 성과를 냈다.

그가 이 사건을 파고든 것은 자책감(自責感)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그는 18년 전 도봉경찰서 강력반 형사로 이 사건을 맡았다. 대낮인 오후 1시에 집에 혼자 있던 주부 A(34)씨가 성폭행을 당한 뒤 목 졸려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A씨 남편의 체크카드로 151만원을 뽑은 뒤 자취를 감췄다. 당시 도봉경찰서가 발칵 뒤집혀 형사·강력팀 전체가 투입된 수사본부가 꾸려졌다. 단서는 현장에 남은 범인의 DNA와 혈액형, 현금입출금기 폐쇄회로(CC)TV에 찍힌 범인의 흑백사진이 전부였다. 김 경위도 막내로 투입돼 선배 형사들 심부름하며 수사를 거들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는 5개월 뒤 인근 경찰서로 발령 나 사건에서 손을 뗐고, 수사본부도 2년여간 범인을 잡지 못한 채 해체됐다. 김 경위는 "A씨 시신을 현장에서 처음 발견했던 초등학생 딸의 눈물과 절망하는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 김응희(맨 왼쪽) 경위가 동료 경찰관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 노원구 부녀자 성폭행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18년 만에 검거한 김 경위는 “후배들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 김응희(맨 왼쪽) 경위가 동료 경찰관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 노원구 부녀자 성폭행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18년 만에 검거한 김 경위는 “후배들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고운호 기자

그동안 서울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그는 올해 초 살인·강도 등 강력 사건을 전담하는 광역수사대 광역1팀에 배치된 후 이 사건에 매달렸다. 광역수사대는 지역별로 담당이 정해져 있는 일선 경찰서와 달리 서울 전역을 담당한다. 그는 "마지막 기회가 왔으니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김 경위는 18년간 지갑에 꽂고 다닌 용의자의 CCTV 사진부터 꺼내 들었다. 범인이 당시 20대였다고 판단하고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출생자 중 강력범죄 전과자를 동료와 함께 전수조사해 8000여 명을 뽑았다. 이어 사진과 혈액형 등을 대조해 용의자 125명의 우선순위 10명을 정했다. 범인 오씨는 세 번째였다. 오씨는 18년 전 절도·강도 등 전과가 있었지만 성폭행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문제는 다음 단계였다. DNA를 대조해야 하는데, 구체적 혐의도 없이 DNA 채취를 요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경위는 오씨가 사는 경기도 양주의 한 아파트에서 잠복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오씨가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검사를 의뢰했다.

지난달 말 국과수에서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자마자 김 경위는 "드디어 잡았다"며 함성을 질렀다. 그는 "처음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전된 것처럼 전기가 흘렀고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유족들에게 범인 검거 사실을 어떻게 전달할지 막막함이 밀려왔다고 한다. "가슴에 묻어둔 유족들의 깊은 상처를 후벼 팔까 봐 두려웠다"는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김 경위는 "범인도 못 잡아 창피한 마음에 유족들에게 연락할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다행히 A씨의 남편은 김 경위에게 "범인을 잡아줘 정말 고맙다"고 했다고 한다.

김 경위는 오씨를 구속시킨 후에야 지갑에 꽂고 다니던 용의자의 낡은 흑백사진을 버렸다. 그는 "피해자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것이 경찰 수사의 기본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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