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42] 아파트에도 있던 '엘리베이터 걸' "가장 큰 고충은 남자 손님들 희롱"

입력 2016.11.02 03:06

1970년대 국회의사당에 설치된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 안의 의자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은 의원도 아니고 귀빈도 아니었다. 승강기 여승무원, 이른바 '엘리베이터 걸'들이었다. 1975년 여의도 의사당 준공 때부터 근무하던 안내양들은 의자에서 책을 읽는 게 주요 일과였다. 하루에 많아야 10여 차례 이용하는 의원들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회의가 밤늦도록 이어지면 그들도 야근했다. 국회 승강기 안내원들은 "툭하면 밤새고 들어오니 어떻게 시집가려고 그러느냐는 부모님 꾸중까지 듣는다"고 하소연했다.

서양 엘리베이터 역사의 초기에 안내원은 남녀 모두의 직업이었는데, 1920년대 이 땅에 건너와선 여성만의 직업인 '에레베타 껄'이 됐다. '데파트 껄(백화점 여종업원)'부터 '까솔린 껄(주유소 여종업원)'까지, 서비스 직종을 굳이 젊은 여성으로만 채워놓고 남성 고객 시중을 들게 만든 일제 강점기 성차별적 풍조의 하나였다.

‘엘리베이터 걸’이라는 새 직업의 등장을 알린 신문 기사에 곁들여진 삽화(왼쪽)와 엘리베이터 걸들이 휴식 시간에 옥상에서 햇볕을 쬐는 모습.
‘엘리베이터 걸’이라는 새 직업의 등장을 알린 신문 기사에 곁들여진 삽화(왼쪽)와 엘리베이터 걸들이 휴식 시간에 옥상에서 햇볕을 쬐는 모습.
일제 땐 극소수 빌딩에만 있던 엘리베이터는 1960년대 후반 고층빌딩 신축 붐이 일면서 급증했다. 엘리베이터 걸도 여성 직업으로 떠올랐다. 당시 한 신문은 이 새로운 일을 하려는 여성이라면 '단정한 용모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썼다. 1970년 엘리베이터 걸 8명을 뽑는다는 기업에 400여 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 직업이 됐다. 기업들은 앞다퉈 이 안내양들을 사옥의 마스코트처럼 내세웠다. "매년 미인 엘리베이터 걸을 6명씩 특채해 고객 서비스의 첨병 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은행도 있었다. 아파트 시대 초기엔 여의도 시범아파트에도 엘리베이터 걸 98명이 고용되기도 했다.

가만히 서서 버튼만 눌러대는 듯해도 그들의 일이란 무척 고된 것이었다. 좁은 공간에 선 채로 상승·하강만 반복하니 피로가 가중됐다. 더 큰 어려움은 손님에게 시달리는 일이었다. "일부 남자 손님들로부터 점잖게 '히야까시'(희롱)를 당한다"고 토로했던 일제강점기 경성의 '데파트 껄'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엘리베이터 걸은 "남자들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게 되면 이상한 눈길로 '밖에서 만나자'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만져 보려고 하는 일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오늘 같으면 소송당해 패가망신하고도 남을 일이다(매일경제 1969년 2월 7일 자). 그들은 스캔들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엔 TV드라마와 소설이 '회장님'과 엘리베이터 걸의 야릇한 관계를 다뤘다. 1993년 삼성 이건희 회장은 일간지 인터뷰에서 자신을 둘러싼 루머에 관한 질문을 받고는 "엘리베이터 걸과 어쩌니 등등" 소문이 났다고 언급하고 "나는 '나 자신이 아니면 그뿐이다'고 생각하고 해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답하기도 했다.

권위주의 시대에 등장한 한국의 엘리베이터 걸은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져 갔다. 1991년 정부는 관청 승강기 안내원들을 1995년까지 모두 없애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국회도 1994년 9월 "의원 승강기의 여자 안내원은 낭비고 고루한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며 없앴다. 이젠 특급호텔에서도 보기 어려워진 엘리베이터 걸이 가끔 뉴스에 등장한다. 지난달 부산고등법원 국정감사 때 청사에 '의원님들을 모실' 엘리베이터 걸들이 급조돼 과잉 의전 논란을 빚었다. 2015년 고등검찰청 국감 때도 똑같은 일이 있어 질타를 받았는데도 재연된 것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국민 눈높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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