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왕' 백승화 감독 "천천히 가는 것, 그것도 용기다"

  • 뉴시스

    입력 : 2016.10.20 09:20

    "적당히 일하고 칼퇴해서 맥주나 한 잔 때리고 싶어요." '꿈을 향한 열정'을 강조하는 담임 선생님에게 공무원이 꿈이라는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걷기왕'(감독 백승화)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꿈을 가지라는 게,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라는 게,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것. 백승화 감독은 꿈이 없어도 된다고, 꿈이 있더라도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다고, 지치면 쉬어가도 된다고 말한다.

    '만복'(심은경)은 선천성멀미증후군을 가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버스·기차·오토바이 등 '탈 것'만 타면 심한 멀미를 해 걸어서 두 시간 거리인 학교도 매일 걸어 다닌다. 만복의 담임 선생님은 제자의 꿈을 찾아주려고 고민하는 인물로 만복에게서 '걷기 재능'을 발견, 육상부 코치에게 그를 경보 선수로 키울 것을 제안한다. 하고 싶은 것도, 잘 하는 것도 딱히 없는 만복은 처음 찾은 꿈, 경보 선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걷기 시작한다.

    '걷기왕'은 일반적인 청춘 영화의 궤도를 역주행하는 작품이다. '청춘의 꿈'을 이야기하는 숱한 영화들이 '하얗게 불태우는' 열정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걷기왕'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백승화(34) 감독을 만났다. 백 감독에게 이 발칙한 '말대꾸'에 대해 들어봤다.

    -개봉 앞두고 있다. 장편 극영화는 처음 연출했는데, 기분이 어떤가.

    "시원하기도 하고, 개봉하면 약간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작은 작품들을 만들어왔지만, 그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후반 작업이 꽤 힘들었다. 시원한 기분이 더 클 것 같다."

    -후반 작업은 왜 힘들었나.

    "장편 극영화가 처음이다 보니까, 손이 많이 가더라. 이전에 만든 작품들과는 달리 많은 분과 함께 작업을 하다보니 그런 것도 있다."

    -언론 시사회(12일) 이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걱정했던 몇 가지가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다행스러운 건 영화의 의도대로 봐주는 시선이 많다는 점이다."

    -'걷기왕'은 어떻게 시작한 작품인가. 일단 경보라는 소재 자체가 독특하다.

    "경보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해서 시작한 건 아니었다. 뭔가 쓸 데 없는 걸 잘하는 주인공이 경쟁 세계에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중간에 소재가 여러 번 바뀌었다. 볼링으로 할까도 생각했는데, 제일 쓸데없는 걸 찾다 보니 결국 '걷기'까지 왔다. 그게 경보로 옮겨 간 거다."

    -경보라는 스포츠가 뛰면 실격이라는 규칙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영화의 방향과 잘 맞아 보이더라.

    "그렇다. 경보는 육상 종목 중 가장 느리지 않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괜찮다고 봤다."

    -'걷기왕'은 결국 청춘영화다. 다큐 형식으로 만들긴 했지만, '반드시 크게 들을 것' 또한 크게 볼 때 청춘물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후속편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또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뭔가.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만들 때, 스물일곱이었다. 꼭 청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걷기왕'을 하면서 결론적으로 또 청춘영화를 하게 됐다. 하지만 내 영화를 관통하는 건 청춘이라기보다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의 주인공인 밴드는 남들이 루저 취급하는 부류이고, '걷기왕'의 '만복'(심은경)은 멀미라는 핸디캡이 있고,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인물이다. 청춘도 청춘이지만, 이런 인물들을 다루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꿈을 향해 뛰어가자'는 일반적인 청춘 영화와는 달리 '천천히 가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메시지는 어디서 온 건가.

    "요즘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 세대가 받는 압박의 종류가 내가 학교 다닐 때의 느꼈던 그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내 또래들이 받은 압박은 심플했다. 공부만 잘하면 됐다. 하지만 이젠 공부와 함께 꿈까지 이야기한다. 재능을 찾아서 그쪽 분야를 파고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TV 특강 같은 데서도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많지 않나.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재능을 발견하고, 그걸 계발하라'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 것 또한 너무 압박으로 느껴졌다. 그런 데서 오는 반발로 이 이야기를 하게 됐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메시지이기는 했다. 그러나 너무 냉소적인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았다.

    "음…대중적인 이야기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결말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봤다. 그렇다고 해서 '꿈도 갖지 말고 집에만 누워만 있자'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만복'은 경보를 그만두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또 찾아 나선다. 급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같은 맥락에서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복'이 경기를 아예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나. 레이스 포기만이 이 영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해주는 건 아니지 않나.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기는 하다.(웃음) 사실 고민 많이 한 부분이다. 시나리오 쓸 때는 기어서라도 결승선에 도착하게 해야 하나 생각도 했다. 그러나 만복이에게 등수가 매겨지는 게 싫었다. 만복이가 레이스를 그만 둔 건 맞다. 그러나 이건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이 선택 또한 용기가 필요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만약 만복이 부상을 입은 채로 경기를 완주한다면, 그것 또한 '꿈을 향해 달리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레이션도 "더이상 달리지 않기로 했다"로 한 건가.

    "그렇다. 꿈이 꼭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꿈은 좋은 것이다. 그걸 찾아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이 압박이 돼서는 안 된다. 좀 오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 '만복'을 연기한 배우 심은경씨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만복' 캐릭터 자체가 심은경 맞춤 캐릭터로 보일 정도였다.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심은경을 염두에 뒀나.

    "그렇지는 않았다. 이 작품이 저예산이다 보니 상업영화에서 큰 성공을 거둔 심은경씨를 떠올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다만 이미지 캐스팅을 할 때, 주변 분들이 심은경씨가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다."

    -심은경 측에서 연락이 왔을 때 놀랐겠다.

    "캐스팅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연락을 받았다. 기분은 좋았는데,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이 분이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심 배우를 만나고 이야기 하면서 정말 좋은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어릴 때를 보는 것 같아서 결정했다는 말이 기분 좋더라. 그 이후에 심 배우를 만나고 그를 관찰하면서 배우의 특성에 맞게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하기도 했다."

    -함께 촬영해보니 어땠나.

    "본능적인 게 있더라. 물론 다른 배우들도 그런 면이 있지만, 심 배우는 더 그런 것 같았다. 물론 자신과 닮은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표정 같은 것들은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편집 과정에서 그런 걸 더 느꼈다. 촬영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고 지나쳤는데, 편집할 때 보니까 정말 좋더라. 심 배우와 작업한 사람들한테 어떤 배우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다들 좋은 배우라고 칭찬했다."

    -심은경씨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캐스팅은 만만치 않다. 배우 허정도·김광규·김새벽·김정영 등은 물론 주연급 연기자는 아니지만 한국영화 곳곳에서 제몫을 다하는 정말 좋은 배우들이다. 이 정도면 꽤 화려한 캐스팅이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캐스팅이 잘 된 건지 사실 모르겠다.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배우같 다 역할에 딱 맞는 연기를 해줬다."

    -이제 막 장편 극영화를 시작했다.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차기작도 청춘에 관한 영화가 될까.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조금 다른 주제를 생각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나온 건 없다. 다만 주제는 달라져도 '걷기왕'과 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할 것 같기는 하다. 단편 하면서 이것저것 해봤는데, 내가 제일 잘 하는 게 이런 '톤 앤드 매너'를 가진 영화더라. 내가 좋아하는 코드들로 영화를 만들어나갈 생각이다."

    -아직 개봉도 안 한 상황이지만, '걷기왕'에 대한 자체적인 평가는 어떻게 내리고 있나.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간이 더 지나봐야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에 대해서는 큰 기대는 안 한다. 크게 실망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이 영화에 투자한 분들에게 손해는 끼치지 않을 정도는 됐으면 한다. 그정도 보답은 할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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