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도 색연필을 몇백만원씩 주고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독일 파버카스텔(Faber-Castell)사 롤프 시퍼런스(Schifferens·57) 대표는 싱긋 웃으며 "없어서 못 파는 걸요"라고 대답했다. "우리 회사가 만든 연필은 지난 255년 동안 시장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모두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쓰는 시대에서조차 말이죠(웃음)."
파버카스텔은 독일 남부 뉘른베르크에서 1761년 창업한 회사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생산 업체로 꼽힌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육각형 연필을 고안해낸 것도, 연필심의 짙기(B)와 강도(H)를 세분화한 것도 이 회사다.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생전 파버카스텔 제품의 애호가로 유명했다. 세상이 온통 디지털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는 요즘도 이 회사는 후퇴를 모른다. 작년 성장률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이 회사가 최근 강세를 보이는 건 소위 프리미엄 시장이다. 연필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을 넘어 소장하려는 이들을 위한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2001년 창립 240주년을 기념해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해 만든 한정판'퍼펙트 펜슬(perfect pencil)'은 당시 1만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1250만원가량 했는데 내놓자마자 동났다. 최근엔 독일 출신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손잡고 '칼박스(Karlbox)'를 내놨다. 수채 색연필과 유성 색연필, 크레용까지 350여 종류를 상자에 담아낸 것으로 우리 돈 300만원이 넘는데 이 역시 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잘 팔린다. 지난달 서울 남산 한 호텔에서 만난 시퍼런스 대표는 "연필 회사가 255년을 버티면서 어떻게 위기가 없었겠어요. 250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기를 넘고 넘어 여기까지 왔죠. 그렇지만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기는 연필
―지금 웃고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잘되고 있다는 거죠. 손글씨를 쓰지 않는 시대, 아이패드와 스마트폰만 쓰는 시대라는데 역설적으로 필기구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거든요. 유럽이나 미국 시장조사 기관들은 2020년쯤 필기구 시장이 200억달러(약 22조7140억원)를 넘어설 거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네요. 이유가 뭘까요.
"사무용품, 실용품으로 연필을 사는 건 확실히 줄었죠. 사람들은 이제 연필을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사는 게 아닙니다.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이유 때문에 사죠.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을 하고, 글씨를 쓰면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싶은 거예요. 컬러링북이 전 세계적인 열풍이잖아요? 색칠을 하면서 그렇게 은밀한 기쁨을 찾고 싶은 거죠. 그러다 보니 연필도 더 까다롭게 고르게 됩니다. 기왕이면 더 아름답고 좋은 제품을 찾게 되는 거죠. 품질에 집착하는 회사가 바로 이럴 때 빛을 발하는 거고요."
창업자인 카스파르 파버(Faber·1730~
1784)는 장롱을 만들던 업자였다. 연필을 만들어 돈을 벌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그의 아들 안톤 빌헬름 파버(1758~1819)가 가업을 물려받아 현재 본사가 있는 뉘른베르크에 회사를 정착시켰다. 1898년엔 파버 가문의 오틸리에 폰 파버와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인 알렉산더 카스텔-루덴하우젠(Castell-Rudenhausen) 백작이 결혼한다. 이때부터 두 가문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파버카스텔'로 바꿨다. 이후 파버카스텔은 1967년 브라질 상카를루스(Sao Carlos)에 있는 색연필 공장을 인수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색연필 공장이다. 1980년엔 말레이시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우개 공장을 세웠다. 1992년엔 친환경 수성 안료 제작 기술을 개발했다.
―300만원 넘게 주고 사는 색연필 상자라니. 막상 열어서 꺼내 쓰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쓰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웃음). 다들 그 색연필 상자를 바라보는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사는 것이죠. 제 아내도 하나 갖고 있는데, 아내는 그걸 거실에 놓아두고 종종 열어 봅니다. '내게 이런 취미와 기쁨이 있었지'를 환기시켜주는 도구 같은 것이겠죠.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굳이 LP를 사서 턴테이블에 얹어놓고 듣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비슷하다면 이해가 될 겁니다."
―과거의 베스트셀러였던 제품이 지금은 잘 안 팔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럼요. 예전엔 연필이나 지우개뿐 아니라 줄자나 주판 같은 제품이 잘 팔렸어요. 이젠 아무도 사지 않죠. 그렇지만 반대로 다른 시장이 커졌어요. 가령 교육 시장이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아이들에게 아이패드보다는 연필을 쥐여 주고 싶어해요.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하고요. 우리는 그들을 위해 더욱 안전하고 단단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거고요."
위기일수록 사람에 투자한다
파버카스텔은 근무하는 직원들의 행복 지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독일 최초로 1884년 근로자 건강보험을 만들고, 직원들을 위해 사내 탁아소를 지은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시대에 이런 복지가 어떻게 가능했던 거죠.
"꼭 필요했으니까요. 당시 독일은 급격한 산업화를 겪었고 농촌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도시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다들 무척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여자고 남자고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봐줄 곳은 없었죠.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누군가는 이들의 아이를 제대로 돌봐줘야만 했어요. 그래서 탁아소를 만들었던 거죠. 직원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하니 의료보험을 도입했던 것이고요. 당연한 일이었던 거죠."
―요즘은 어떤 복지에 신경 씁니까.
"19세기에 영아 사망률이 문제였다면, 요즘엔 직원들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거나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는 게 큰 문제죠. 다들 일에 지치지 않도록, 건강한 심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회사가 도와주는 게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에 정신과 상담의가 와서 모든 직원이 상담을 받게 하고, 퇴근 후 요가 같은 활동을 하도록 지원합니다. 독일 본사뿐 아니라 전 세계 8000여 명의 모든 파버카스텔 직원이 이런 혜택을 받고 있죠."
―기업은 수익을 내기 위한 조직인데, 이런 복지가 부담되는 건 아닙니까.
"오늘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사라는 게 하루만 돌리고 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를 오랫동안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건강하고 훌륭한 직원이 필요해요. 그런 직원을 얻기 위해선 회사가 직접 직원의 건강을 살피고, 직원들이 제대로 일을 하면서 동기 부여를 얻고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의 품질이 어떤지 계속 확인해봐야 하고요. 복지라는 게 알고 보면 결국 이런 것들을 챙기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사람에게 투자할수록 회사가 잘되는 거죠."
―위기를 결국 사람 덕에 넘겼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독일은 인건비가 무척 비싼 나라죠. 그래서 15년 전쯤 독일의 많은 기업이 공장을 동유럽으로 옮겼어요. 우리도 공장을 체코로 이전할 것을 무척 진지하게 고민했고요. 하지만 결론은 '독일 생산을 고집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인건비가 들더라도 독일 생산의 노하우를 포기할 순 없다'는 것,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숙련된 직원들을 저버릴 순 없다'는 것이었죠. 요즘 돌아보면 정말이지 탁월한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동유럽으로 공장을 옮겼던 회사들은 나중에 다시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다가 이제 다시 독일로 돌아오고 있거든요. 기업을 오래 운영하기 위해선 때론 인건비 절감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다들 깨달은 거겠죠."
"연필 만들며 베는 나무보다 더 많이 심는다"
파버카스텔은 해마다 2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회사로도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지속해 현재 브라질 남부에 2500㎢에 이르는 숲을 조성하고 있다. 시퍼런스 대표는 "우리 회사는 매년 20억개의 연필을 만든다. 이를 위해서 베어야 하는 나무보다 더 많은 양의 나무를 심고 있다. 이 덕에 국제기구로부터 '탄소중립기업(carbon-neutral corporation) 인증서'를 받고 있기도 하다"고 했다.
―이런 활동은 착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이미지가 아니라 책임 때문입니다. 회사 2세손이었던 안톤 빌헬름 파버는 '회사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내가 다음 세대에게 건강하게 물려줘야 할 책임'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이 말이야말로 파버카스텔이 계속 계승해야 하는 핵심 가치라고 믿습니다. 회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으려면 회사가 제품을 만들면서 내놓는 폐기물까지 제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를 베면 그만큼 심을 줄 알아야 하고, 연필 때문에 생기는 폐기물은 재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우리는 연필을 생산할 때 나오는 폐기물을 압착해서 난방연료로 쓰고 있습니다."
―회사가 이윤을 내는 게 결국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는 얘기입니까.
"정확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회사는 꾸준히 건강하게 돈을 벌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25주년 근속 직원들을 모아 축하 파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50년 근속한 직원이 있는데, 그 직원의 딸도 25주년 근속자이더군요. 그날 둘이 함께 상을 받고 기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걸 보면서 모든 직원이 다들 감격해했어요.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저 단순히 오늘 하루를 넘기기 위해서가 아닌, 25년 그리고 또 다른 250년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미래의 그 순간을 위해서요. 회사라는 건 어쩌면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버티는 기둥 같은 존재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