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저 총각김치 맛있겠다." 서울 정동길을 산책하던 소설가 금희(37)가 노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옆에서 걷던 소설가 김숨(42)이 "잘 익었네" 맞장구친다. 흔한 뿌리채소로도 웃음이 자란다. 26일 개막하는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하루 전날 만난 두 여자가 중국 창춘과 울산, 두 고향의 토양을 뛰어넘어 문학적 양분을 나눴다. 이번 축제에 참가하는 한국·외국 작가 14팀 중 한 뿌리의 언어로 묶인 경우는 두 사람이 유일하다.
정착과 이주, 유랑적 인간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두 사람은 뿌리의 작가라 할 만하다. 김숨이 지난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뿌리 이야기' 등을 통해 인간이 뿌리내린 심근(深根)과 천근(淺根)의 성질을 얘기한다면, 금희는 조선족으로서 마주하는 제3세계적 감정을 작품 전체를 통해 그려낸다. 김숨은 "둘 다 국적과 거주지에서 뿌리 뽑힌 채 방황해야 하는 운명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뿌리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어"라고 소설 '뿌리 이야기'는 시작한다. 금희 역시 늘 이 냄새를 추궁당한다. "텁텁하고 씁쓰레한… 약간 누린 것 같기도 한 중국냄새"('노마드')와 한국과 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종류의 냄새다. "바깥으로부터 자꾸 정체성을 질문받게 돼요. 제가 먼저 소설을 통해 스스로 껍질을 벗고 싶었어요." 김숨은 '태생'이란 단어를 꺼냈다. "태어날 때부터 불안을 타고났어요. 제 장소와 자리를 벗어나는 두려움요. 동네 밖을 나가는 게 께름칙해 약속을 취소할 때도 있죠. 이런 제 성격과 닿아 있는 이들을 볼 때 영감이 곤두서는 것 같아요."
중국서 교사로 일하던 금희는 2002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돈 벌러 2년간 모텔 청소, 식당 보조 등 일터를 전전했지만, 곧 다시 글쓰기의 세계로 돌아갔다. "조선족 사회에서 소설가요? 돈·명예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도 쓰고 싶은 걸 어째요. 그렇게 태어난 것을." 2007년 등단해 지난해 11월 발표한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최근 국내 문학상 2개를 잇따라 수상했다. 조선족 여성이 일련의 체험을 통해 '이도 저도 아닌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내용이다. 김숨도 소설과 무관한 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대책 없이 소설에 매달린 경우다. 김숨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작가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 같다. 마흔 넘어서야 내가 '쓰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 주제는 '잊혀진, 잊히지 않는'이다. 기억은 두 작가를 규정하는 강렬한 메타포. 김숨은 1987년 시위 도중 숨진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그린 'L의 운동화'와 생존 위안부 할머니를 묘사한 '한 명'을 통해 기억의 복원에 몰두하고 있다. 금희에게 소설은 잊히고 있는 모어(母語)를 그러안으려는 필사의 행위다.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옷을 입고 살면서도 내 알몸이 어떤지는 알아야 하는 것이죠."
두 사람의 차기작 역시 러시아 연해주 강제 이주(김숨)와, 조선족 가족이 겪는 폭력적 질문(금희)으로 이어진다. 26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3관에선 '잘 익은' 두 사람의 뿌리 얘기가 낭독 공연으로 펼쳐진다. 좋은 냄새가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