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지원자 70%가 海外유학파라는 통역장교 시험… "하버드大 출신도 떨어지는 걸 봤죠"

조선일보
  • 권순완 기자
    입력 2016.09.24 03:00 | 수정 2016.09.24 13:35

    "복무 중 어학능력 유지… 제대 후 취업에 유리" 재수·삼수하기도

    "어…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아니죠. 'in the immediate term'은 '단기적으로'라고 해석해야죠. 여러분, 뜻이 많은 'term' 같은 단어는 관용구를 잘 모르면 이렇게 엉뚱한 소설을 쓰게 되죠."

    지난 21일 낮 서울 역삼동 한 통역 장교 시험 학원. 영어 강사가 학생들에게 30초짜리 영어 지문을 들려주고 무작위로 한 학생을 지목해 통역을 시켰다. 해석에 틀린 곳이 있거나 학생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강사가 가차 없이 공개적으로 질타했다. 통역 연습이 끝나자 군사 관련 단어 뜻을 묻기 시작했다. "'Department of Defense'는 (미국) 국방분데, 'Department of the Army'는 뭘까" 하고 묻자 지목된 학생 세 명이 연달아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를 떨궜다. 답은 '육군성'이었다.

    공군 통역장교 경쟁률

    하버드나 프린스턴대 출신도 고배를 마신다는 통역 장교 시험에 매년 미국 유학생과 한국 명문대 출신 수백 명이 몰리고 있다. 재수, 삼수를 하며 1년 넘게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군별로 경쟁률이 10대1 이상 치솟기도 한다. 준비생들은 "군 복무 중 어학 능력을 유지·계발할 수 있어 제대 후 취업에 유리하고, 비교적 합리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할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는 매년 상·하반기에 대학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영어 통역 장교 40여 명을 뽑고, 여기에 매번 200여 준비생이 지원한다. 지원자 70% 이상이 해외 유학파이고, 나머지 국내파에서도 미국·유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이 많다. 서울 강남의 학원에서 7년째 통역 장교 준비생들을 가르쳐 온 강천호씨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들과 한국의 'SKY대' 출신이 밟히듯이 많기 때문에 따로 묻지도 않고 기억도 못 한다"고 말했다. 한 해군 통역 장교는 "올해 해군에서 치른 시험에서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 출신이 떨어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시험 내용은 한·영, 영·한 통·번역과 영어 면접이다. 번역도 토씨 하나 빠뜨리면 안 되기 때문에 어렵지만, 지원자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통역이다. 단어 70~130개 길이의 영문 녹음 음성을 30초~1분 동안 들려주면, 들으면서 노트에 적고 음성이 끝나면 바로 통역을 시작해야 한다. 통역 중 "어…" "음…" 하는 불필요한 음성은 '필러(filler)'라고 하는 금기(禁忌)다. 이미 통역한 문장에 자신이 없어 처음으로 돌아가는 습관은 '백 트래킹(back tracking)'이라는 감점 대상이다. 지문은 주로 '핵 안보' '킬 체인' 등 군사 관련 내용이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한 육군 통역 장교는 "처음 시험 볼 땐 군사 용어만 잔뜩 외워 갔는데, 오디오에서 플라톤이 어쩌고 하는 철학 내용이 나와 멍해지는 바람에 재수했다"고 말했다. 많은 수험생이 국방부에서 2년에 한 번 국·영문으로 발행하는 '국방백서'를 늘 끼고 다닌다.

    준비생 중 다수를 차지하는 유학생들은 "영어 실력과 통역 실력은 별개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한다. 적게는 대학 4년에서 많게는 10년 이상 영어권에서 유학하면서 영어엔 잔뼈가 굵었다고 자평했는데, 실제 통역을 해보니 기초적 언어 감각과 임기응변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통역 장교 시험을 6개월째 준비 중인 정영환(23)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필리핀에서 공부했지만 '천고마비의 계절'이나 '환골탈태' 등이 제시문으로 나오면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한자어가 나오면 아예 이해를 못 하기도 한다. 8년 차 군 통역 시험 강사 김승국씨는 "수험생 중 '함의(含意)'나 '할증(割增)' 등 단어를 해석하지 못해 쩔쩔매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수험생들은 일반적으로 육·해·공·해병대 중 공군을 가장 선호한다. 공군이 지난 1992년 군에서 가장 먼저 통역 장교를 따로 선발하기 시작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나 국방부 장·차관, 합참의장 등 고위직 통역이 '공군 할당'으로 관행상 굳었기 때문이다. 한 예비역 공군 통역 장교는 "이런 자리는 일생의 영예이기 때문에 실력이 쟁쟁한 사람들이 공군으로 몰리고, 또 그래서 공군 통역의 명성이 유지된다"고 말했다. 2010년 5월 천안함 합동조사단 발표 현장에서 능수능란한 통역으로 언론에까지 보도된 조군호 당시 중위도 공군 소속이었다. 일부 수험생은 수도권 보직이 많은 육군을 선호한다고 한다.

    공군 관계자는 "주로 군사 교재 등의 번역을 담당하는 어학병과 달리, 통역 장교들은 고위급 간부들을 맨투맨으로 담당하며 군사 회담이나 만찬 분위기를 주도한다"며 "통역 장교의 태도와 어투가 모두 군의 얼굴이 되는 만큼 앞으로도 엄정한 기준에 따라 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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