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맞는 말인데 맞으면 아프다… 솔직함 가장한 '말 폭력'

입력 2016.09.20 03:00 | 수정 2016.09.20 06:43

[팩트 폭력]

최근 온라인서 쓰이는 신조어
상대의 주장에 사실적 통계를 내밀어 반박 못하게하는 대응법

"응원해 달라"는 수험생 글에 "3년치 통계상 넌 대학 못간다"며 공격하는 경우 많아지기도

"올케, 이건 아니다. 다 쑤셔 박고 뭐 하는 짓이지?"

"형님도 정리 잘 안 하시잖아요."

'추석특집'으로 방송된 TV조선 '엄마가 뭐길래'의 한 장면. 방송인 조혜련이 신혼인 남동생 집에 들러 한마디 하자 올케의 '반격'이 이어졌다. 배경 화면으로는 과거 방송에서 조혜련이 냉장고 정리를 하나도 안 한 장면이 깔렸다. 방송 뒤 인터넷에선 '묵직한 팩트 폭력 당한 조혜련' 등의 글이 게시판을 달궜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팩트 폭력'이란 신조어가 널리 쓰인다.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와 폭력, 폭행이 결합한 단어다. 상대의 주장, 의견 등에 대해 반박할 수 없게 각종 데이터·통계 등을 내밀어 '입 다물게' 하는 대응법. '돌직구'의 연장선상으로 보기도 한다.

[트렌드+] 맞는 말인데 맞으면 아프다… 솔직함 가장한 '말 폭력'
/박상훈 기자
요즘엔 A에 맞대응하는 B보다는 구경꾼이 그 상황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낄 때 쓰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유명 강사 김미경씨가 한 방송에 나와 "열 살짜리 아들 10년 기다려서 한의대 보내는 것보다 서른여덟 살 엄마가 수능 보는 게 더 빨라요. 그런 머리가 안 된다고요? 어머니 아들도 똑같아요"라고 지적하자 '극성엄마에 대한 강사의 속 시원한 발언'이라며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게 그런 사례다.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를 향해 열한 살 매튜라는 꼬마가 "트럼프의 말을 부드럽게 하면서 뒷수습을 하는 게 당신 역할이냐"고 질문한 영상도 유튜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됐다. "한국이었다면 발언권 묵살" "팩트리어트(팩트+패트리엇 미사일) 등장" "정해진 질문만 받는 한국이 배워야 할 선진국 클래스" 등 댓글이 잇따라 달렸다.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가 빠르게 돌아다니는 SNS와 '팩트'를 대비시켜 'SNS란 선동(S)과 날조(N)로 승부(S)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엔 '사실'보다는 상대에게 무안을 주려는 '폭력'에 방점이 있다고 비친다.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말로 포장해 '꿈 깨라'처럼 폭력적으로 거칠게 반응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응원해 달라"는 수험생에게 "3년치 통계상 네 성적으로 대학 문턱은 어림도 없다"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추석 뒤 각종 게시판엔 "친지들에게 비혼(非婚) 선언을 했는데 '안 하는 거냐? 못하는 거지'라고 입을 모으더라"라든지, "내년이면 마흔인데 눈 높은 척 그만 하고 재취 자리부터 알아보라 하더라" "여자 없다 핑계 대지 말고 요즘 동남아시아 여자들도 좋다던데 그쪽을 알아보라 했다" 등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 교수는 "우리의 대화법을 보면 대개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서 얘기하는 게 보통인데, 최근 온라인 글을 보면 의미는 결여되고 날카로운 화법만 남게 됐다"고 전했다.

솔직한 것을 넘어 무례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과거 한국은 겸양이 중시되고 주변 상황을 이해해야 대화의 맥을 짚을 수 있는 문화였지만 단문 형식의 SNS가 인기를 끌면서 직격탄을 날려야 환영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또 "사실보다는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많은데도 '팩트'라고 주장하며 함부로, 더 자극적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상대를 무안하게 해 쾌감을 느끼려는 또 다른 '말폭력' 현상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세태가 팩트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는 해석도 있다. 문화 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는 "젊은이들이 눈에 보이는 스펙만 중요시하다 보니 논쟁에서도 추상적이기보다는 숫자로 보이는 단순 사실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며 "가장 확실하다는 통계도 단순 숫자일 뿐 의미를 어떻게 부여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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