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라톤엔 희망이 없어… 신문 보고 부끄러워 울었다"

조선일보
  • 최종석 기자
    입력 2016.08.24 03:00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했던 86세 함기용 선생 인터뷰]

    - 낯 뜨거운 꼴찌 경쟁… 내가 죄송
    "세계서 가장 힘든 훈련 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선수 있나
    황영조·이봉주 때와 달리 나라를 빛내겠다는 자세가 없어
    아프리카 선수들 재능도 좋지만 죽기 살기로 뛰니 우승하는 것"

    지난 4월 본지와 만난 한국 마라톤의 레전드 함기용(86) 선생.
    지난 4월 본지와 만난 한국 마라톤의 레전드 함기용(86) 선생. /장련성 객원기자

    한국 마라톤의 원로 함기용(86) 선생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는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고 국민께 죄송해 혼자 울었다"고 말했다. 안타깝고 부끄럽다고도 했다.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마라톤 국가대표 손명준(22·삼성전자)과 심종섭(25·한국전력)은 140명 중 131위(2시간36분21초)와 138위(2시간42분42초)를 했다. 일본인 출신 코미디언 다키자키 구니아키(139위·2시간45분55초)와 '꼴찌 경쟁'을 벌인 데 대해 팬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표하고 있다.

    한국 마라톤의 레전드인 함 선생은 "내가 죄인"이라고 했다. 그는 66년 전인 1950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해 신생국 대한민국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함 선생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태극기를 달고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첫 한국인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을 맡았던 1990년대엔 황영조와 이봉주가 다시 한국 마라톤의 저력을 세계에 떨쳤다. 23일 함 선생은 한국 마라톤의 미래를 위해 어렵게 쓴소리를 꺼냈다.

    "지금 한국 마라톤엔 희망이 없습니다. '철학'과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우리 후배들이 실력이 없는 선수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육상 못 한다는 것도 옛말이에요."

    함 선생은 "황영조, 이봉주 때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선수를 길러 대한민국의 이름을 전 세계에 날리겠다는 정신이 살아있었다"며 "당시엔 그 정신을 먼저 다진 뒤에 장거리를 뛰었고 마라톤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라톤은 그저 여러 스포츠 종목 중 하나가 아니다"며 "정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없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힘든 훈련을 이겨낸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승할 자격이 있다는 게 상식이자 정의(正義)인데 우리 육상이 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한국 육상 선수 중에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힘든 훈련을 극복하고 여기 섰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이번에 몇 명이나 됩니까."

    그는 "케냐나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체격 조건 때문에 우승하는 것만은 아니다"며 "그들은 우승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린다"고 했다.

    함 선생은 "선수를 탓하기 전에 지도자들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지도자는 자기를 희생하며 현장에서 선수를 기르고 연맹은 그런 지도자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면서 "선수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함께 먹고 자면서 훈련시키지 않으면 마라톤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요즘 애들은 훈련 조금만 세게 시키면 다른 팀으로 가버린다고 하는 지도자들이 있는데, 이는 지도자와 선수가 일심동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 선생은 "고인이 된 정봉수 감독은 황영조와 함께 울고 웃으며 고된 훈련을 견뎌냈기 때문에 '몬주익 언덕'의 신화(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를 쓸 수 있었다"고 했다.

    요즘 육상을 하려는 선수가 없는 것 같다고 하자 함 선생은 "원래 세계적인 선수 한두 명을 잘 길러내 맥을 잇는 게 마라톤"이라고 잘랐다. 그는 "마라톤이 어디 팀 스포츠냐"며 "소수라도 잘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함 선생은 인터뷰 내내 비분강개했지만 사진 촬영은 끝내 거절했다. "나도 육상인으로서 국민 앞에 설 면목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