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바라봐/ 외모에 속지 마"는 '덜 읽은 삼겹살'이란 제목의 시(詩)다. "이게 뭐라고/ 이리 힘들까"의 제목은 '메뉴 선택'. "고민하게 돼/ 우리 둘 사이"도 시다. 제목이 '축의금'이다.
스스로를 '시팔이' '시잉여송라이터'라 부르는 하상욱(36)의 시는 가벼운 말장난 같으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익살과 촌철이 있다. 그의 시집 '서울 시'는 25만부 이상 팔렸고,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때일까' 등 사랑에 관한 글을 모은 '시밤'(시 읽는 밤)은 지난해 9월 출간 이후 시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상욱뿐 아니다. '읽어보시집'을 쓴 최대호를 비롯 이환천, 글배우도 SNS에서 사랑받는 SNS 시인이다. 기성 시단에서는 "시도 아니다"며 비난하지만 이런 시집 열풍이 침체된 도서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사실이다. 뭣보다 그들은 '시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20~30대 젊은 세대에게 퍼뜨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재생의 '씨앗'은 광화문 교보 글판이 심었다. 지하철 안전문엔 설익었지만 소박한 감성이 살아 있는 시민들의 시작(詩作)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로봇이 모든 걸 다 한다는 AI 시대, 사람들은 왜 시에 열광할까?
왜 다시 시일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청년 윤동주(1917~1945)는 자신의 시집이 2016년 베스트셀러가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주옥같은 작품 31편이 수록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소와다리)이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올해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올 초 117만 관객을 모은 영화 '동주'의 영향이 있다 해도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 자체가 이례적. 윤동주뿐 아니라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백석의 '사슴' 초판본도 무수히 팔려나갔다.
지난 15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시 분야 판매율이 지난해 동기 대비 36.4% 증가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도 올해 8월까지 전년 대비 각각 109%, 73.8% 상승했다고 밝혔다. 시집 발행 종수도 늘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2015년 발행된 시집은 1662권으로 3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박준(34)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는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OtvN의 북토크쇼 '비밀독서단'에 소개된 후 판매량이 급증해 6만2000부가 팔려나갔다. 시 에디터이자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쓴 김민정 시인은 "방송에 나왔다고 해서 시집 판매량이 늘거나 하지 않는데 최근에는 시집에 대한 반응이 남다르다"고 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쓴 정재찬 한양대 교수는 "드라마에 시집이 나오고 방송에서 시를 낭송하게 된 건 시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스24 문학 담당 김성광 MD는 "여러 시인의 좋은 시를 가려 묶는 컴필레이션 시집 비중이 최근 들어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며 "일러스트나 명화, 사진 등과 시가 결합하는 형태도 인기"라고 했다.
시를 소비하는 청춘
시를 소비하는 독자층이 대폭 젊어진 것도 주목된다. 주 독자층은 여전히 40대 여성이지만 최근 들어 20~30대 여성이 크게 늘었다. 예스24에 따르면, 20대 여성이 구매한 시집이 지난해 1만8052권에서 올해 5만3070권으로 3배나 급증했다. 정호승, 나태주, 기형도, 최승자 등 중견 시인들 작품이 꾸준히 팔리지만 독자층이 젊어지면서 박준, 황인찬, 유진목, 이이체, 오은 등 젊은 감성을 사로잡는 20~30대 작가들이 떠오르고 있다. 김민정 시인은 "젊은 시인들은 시에 대한 엄격함이 없고 자기 이야기를 어려운 언어로 말하기보다 쉽고 미적으로 풀어낸다"며 "젊은 독자들 입맛이 다양해져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읽는 게 아니라 취향에 따라 시집을 골라 읽는다"고 했다. 젊은 시인들이 SNS는 물론 낭독회를 통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노력도 주효했다. '구관조 씻기기'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뒤 '시인계의 아이돌'로 사랑받는 황인찬 시인은 "처음에는 누가 낭독회를 오고 시인을 만날까 했는데 시인을 아껴주고 시를 사랑하는 20·30대 젊은 층이 단단하더라"며 "시대에 맞게, 세대에 걸맞게 소통하며 독자들이 시와 시인을 따라오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고 했다. 출판사에서도 젊은 독자와 시인 간의 적극적 소통 창구를 만들었다. '주문 제작, 시'는 민음사의 블로그(blog.naver.me/minworld.com)를 통해 독자 사연을 받아 시인이 그 사연을 바탕으로 직접 시를 써준다. 창비 블로그(blog.changbi.com)에서는 신미나 시인의 웹툰 '시 읽어주는 누나, 시(詩) 누이'로 시를 좀 더 쉽게 만나게 해주고, 김사인 시인은 창비 팟캐스트 '시시(詩詩)한 다방'을 운영한다. 창비는 9월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도 출시할 예정이다.
이것도 시야?
시 열풍에 대한 우려와 지적도 나온다. 정과리 문학평론가는 "성찰적이기보다 느낌의 강렬성에 치중하거나 시가 가진 메시지나 추구하는 바와 관계없이 시의 감각적 즐거움만 보고 이미지나 문화 상품으로만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황인찬 시인은 "시집이 독서를 위한 책이 아니라 소품, 액세서리, 혹은 이미지로서만 소비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시인 김상혁은 "SNS 시는 대중 속에 생겨나 대중을 대변한다"며 "SNS 시는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아 세대와 직종과 관계없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찬 교수는 "시의 소재와 이야기 자체가 삶과 멀지 않고, 시 자체의 감각적인 문학적 특성이 요즘 흐름에 맞을 뿐 아니라 강의나 방송, SNS라는 계기를 통해 20대를 비롯한 다양한 세대와 가까워진 것"이라며 "마치 뜨거운 태양을 피해 숲의 그늘에 들어온 듯 시는 경쟁에 시달리고 기술과 정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