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중국의 '心氣' 살피며 잘 지내는 건 원치 않는다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6.07.28 03:11

    "국내에선 全斗煥의 '12·12 사태'로만 기억되지만
    그날 미국과 나토는 '이중 결정'에 서명했다
    핵전쟁의 幽靈이 떠다니는 기분을 맛봤겠지만…"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1979년 12월 12일. 국내에서는 전두환(全斗煥)의 '12·12 사태'로만 기억되지만, 사실 이날은 세계사적인 기념일이다. 미·소(美·蘇) 냉전 종식의 방아쇠가 당겨진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의 외교 및 국방장관들이 만났다. 참석자들은 거의 열 달째 끌어오던 소련 대응 전략 합의문에 마침내 서명했다. 사인을 하는 동안 이들은 핵전쟁의 유령(幽靈)이 눈앞에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맛봤을 것이다.

    그해 들어 소련은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을 폴란드와 체코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전역이 사정권에 들어갔다. 전술핵 균형이 소련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치명적 안보 위기에 직면한 서방 진영은 세계 2차대전의 악몽(惡夢)을 떠올리며 난리 쳤을 게 당연했다.

    이들은 소련의 핵미사일에 맞서 '퍼싱Ⅱ' 등 미국 핵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강공 전략에 합의했다. 그러면서 소련 측과는 '핵미사일을 함께 철수하자'는 협상을 병행한다는 것이다. 이게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이중 결정(dual track decision)'이다.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핵미사일의 배치 숫자가 늘어나거나 자존심을 건 한 판 핵전쟁이 터질 수 있었다.

    미국 핵미사일을 자기 영토에 배치해야 하는 서독의 고민이 깊었다. 좌파 정당 사민당을 이끄는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소련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슈미트는 '실력 대결이 아닌 데탕트(화해)를 통한 평화 실현'의 신봉자였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과는 개인적으로 친했고, 동독과의 대화도 잘 되고 있었다.

    그는 미·소 간 힘의 대결에서 나름대로 '균형자' 역할을 원했다. 두 번이나 모스크바를 방문해 브레즈네프와 만났다. 그러는 동안 미국 핵미사일의 서독 배치는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서방 진영에서는 "합의하고도 저렇게 하는 서독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왔다. 미국 정보부에서는 그가 배신할 것으로 봤다. 서방 진영의 불신을 받은 그는 심지어 사민당 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이중 결정' 합의에서 발을 빼려는 듯한 의회 발언까지 했다.

    그가 모호한 태도를 보인 데는 서독 내 분위기도 작용했다. 거리에는 '반핵 평화운동' 깃발 아래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몰려나왔다. 이들은 소련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선 서방 진영의 '이중 결정'을 "전쟁 도발자들의 정책"이라고 연일 규탄했다. 미국과 그의 파트너 국가들이 바로 전쟁 도발자였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 모든 사태를 촉발시킨 소련의 핵미사일 배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슈미트 정부는 '이중 결정'을 둘러싼 사회적 혼란과 함께 높은 실업률, 경제 침체 등으로 코너에 몰렸다. 그는 의회 불신임을 받아 퇴진했다. 그전까지 정국 운영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던 그는 왜 거꾸러졌을까. 국제 정세의 큰 변화에 올라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데탕트 분위기가 퇴조하고 미·소 간 대결이 고조되는데도 그는 양쪽을 오가는 '양다리 외교'에 미련을 못 버렸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주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한계를 몰랐던 것이다. 뒷날 그는 '미·소를 오가는 통역(通譯) 노릇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급류가 밀려오는 결정적 순간에 그는 어느 진영에 굳건하게 서야 하는지를 놓친 것이다.

    뒤이어 헬무트 콜 총리의 우파 연립 정부가 출범했다. 콜은 취임 1년 뒤 미국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는 "핵미사일 배치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우리와 미국의 관계는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서방 진영의 연대는 와해됐을지 모른다"고 술회했다. 서독의 핵미사일 배치는 소련을 압박해 1987년 말 핵미사일 감축 조약을 이끌어냈다. 이는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었고 독일 통일과 공산제국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콜 총리는 당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점점 많은 사람이 역사의 긴 호흡을 잃어가고 있다. 긴 역사적 안목이 아니라 점차 현실에만 매달리는 세계관에 자족했다. 이 때문에 자유나 인권 같은 민주주의적 공통 가치라는 중요 문제에서 헷갈리고, 미국과 소련을 똑같이 보려는 시각이 생겼다. 이는 경제적·외교적 위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위기이기도 했다."

    남중국해에서 미·중(美·中) 간의 패권 충돌로 신(新)냉전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사드 배치 갈등은 그 작은 부분인지 모른다. 평시에는 외교·경제적 손익도 따져야겠지만, 결정적인 순간 어느 가치와 진영에 서느냐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요즘 중국이 드러내는 온갖 '갑질' 행태를 보면 명색이 '대국(大國)의 그릇'인지 의문스럽다. 한·미 동맹 관계가 없었으면 그동안 우리가 중국을 어떻게 감당해왔을까도 싶다. 우리는 '속국'처럼 대접받으면서 중국의 심기를 살피며 잘 지내는 것은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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