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천황과 일왕

    입력 : 2016.07.25 03:13 | 수정 : 2016.07.25 09:44

    김수혜 도쿄 특파원 사진
    김수혜 도쿄 특파원

    올해 여든셋 아키히토 일왕(日王)이 '생전에 양위하겠다'고 밝혔다. 기사 쓰다가 잠깐 손이 멎었다. '천황이라고 써야 하나, 일왕이라고 써야 하나.' 일왕이라고 썼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그를 일왕이라 부른다. 황제와 왕을 나누는 경계는 간단치 않다. 동서양이 다르고 역사적 맥락이 다르다. 단순하게 봐서 왕이나 제후를 거느릴 때 황제라고 한다면 일본 군주는 그냥 왕이다. 일본인이 '천황'이라 한다고 우리가 따라해줄 필요는 없다. 일본 제국주의 35년은 우리에게 지옥이었다. 피해국이 만족할 만큼 반성도 안 하면서 언감생심 황제라 한다.

    이런 논리에 공감하면서도 일왕 기사를 쓸 때마다 미묘하게 불편하다. 일왕을 일왕이라 부르면 작은 모순이 생겨서다. 가령 일왕이 사는 궁궐 이름은 '고쿄(皇居)', 왕족에 대한 법률 이름은 '고시쓰덴판(皇室典範)'이다. 한국 신문은 독자가 알기 쉽게 이런 말을 한자어로 적는다. '일왕이 황거에서 오바마와 만나….' '일왕이 퇴위하려면 황실전범부터 손봐야….' 이럴 때 기자들은 머릿속 교열기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황거도 '왕거'라고 고쳐 쓰는 게 맞나, 놔두는 게 맞나.

    일본강점기를 몸으로 겪은 선배들이 뭐라고 썼나 그래서 궁금했다. 해방 공간 기자들은 그냥 천황이라고 썼다. 1950년대, 60년대, 70년대도 쭉 그랬다. 일왕을 천황이라고 써도, 그 시절 말과 글엔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실감과 기개가 있다. 1961년 3월 1일자 조선일보 4면 기사를 소개한다. 3·1 운동 때 10대였던 초등학교 선생님 인터뷰다.

    "3·1 운동 후 첫 음악 수업 때 일본 선생님이 노래를 시키니까 아무도 음을 내는 사람이 없었어요. 선생님이 왜 안 부르느냐고 하자 한 학생이 소리쳤어요. '당신의 나라 천황이 죽었을 땐 가무를 금하면서 우리 임금님이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하란 말이오!'"

    1989년까지 일왕을 일왕이라고 쓴 조선일보 기사는 4건뿐이다. 나머지는 천황이라고 썼다. 동아일보도, 경향신문도 마찬가지다. 한겨레도 창간 초기엔 천황이라고 썼다. 1988~1989년을 기점으로 언론과 국민이 일왕으로 돌아섰다. 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파동(1986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사건(1989년)이 잇따른 데다,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숨지면서 전쟁 책임이 부각됐다.

    정부는 명확한 입장 없이 오락가락했는데 1998년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이 선을 그었다. "상대국 호칭 그대로 불러주는 게 외교 관례다. 정부는 천황이라고 부르겠다." 그 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일왕을 만났을 때, 두 사람 다 상대를 '천황 폐하'라고 불렀다. 2016년 외교부 공문도 천황이라고 쓴다.

    일왕을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우리가 강해지지 않는다. 일왕을 천황이라 부른다고 우리가 낮아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고로 미국은 '엠퍼러(emperor)', 중국은 천황, 대만은 천황·일왕을 섞어 쓴다. 태평양전쟁 때 쑥밭이 된 베트남 외교관이 "옛날은 모르지만 지금은 정부도 언론도 '냐부어녓반(일본 황제)'이라고 쓴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외교관이 "우리도 '마하라자 주폰'이라고 쓴다"고 했다. "'마하라자'는 황제, '주폰'은 일본이에요. 태국은 왕이니까 그냥 '라자'(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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