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안병현

40대 중반의 대기업 부장 A씨는 혼자 속 썩일 때가 많다. 야근을 밥 먹듯 할 정도로 일에 치여 허덕이는 와중에도 매번 신규 프로젝트 검토 업무를 받아온다. 속으로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면서도 자기한테 일이 맡겨지면 거절하지 못한다. 돌아서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A씨는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멘탈 을(乙)' 유형. 김선미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싫은 소리'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은 '거절은 무례한 행동' '내가 거절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미적거리다 거절을 못한다"고 말했다.

거절하지 못해 피곤한 사람들

멘탈 을은 피곤하다. 거절하지 못한 각종 부탁과 업무에 항상 쫓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며 모두 잘해내려 애를 쓴다. 마음속은 '거절 당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 아이디어를 빼앗기는 일도 다반사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대리 B(33)씨는 바로 위 과장 때문에 요즘 '멘붕(멘탈 붕괴) 직전'이다. "언젠가 회의 중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내 아이디어를 자기 계획으로 만들어버렸더라"고 했다. '친하다'는 이유로 세차(洗車)까지 부탁하는데, 거절 못하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권영애 한국심리케어마음치유연구소 연구원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인해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사례"라고 말했다. '나는 유독 그 사람이 힘들다'(와이즈베리)의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타인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유형에 대해 "자기 중심적 성향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일을 자기 것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가족적인 분위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조직에서 곧잘 나타나는 현상. 김석주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자기 필요할 때는 가족한테나 부탁할 사소한 것까지 요구하다가 냉정해지면 계약 관계로 돌아선다"고 말했다. 또한 "책임감이 강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들 중에도 의외로 멘탈 을이 많다"고 했다.

"멘탈 갑 며느리 탓에 힘들어요"

D(65)씨는 맞벌이 아들 내외를 위해 반찬을 자주 해다 준다. 빈집에 시어머니 들르는 것을 며느리가 싫어할까봐 대부분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고 온다. 최근엔 손주까지 돌보게 됐는데, 작은 상처만 나도 아들·며느리 걱정할까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D씨는 "내가 젊었을 때 까다로운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한 터라 좋은 시어머니가 되려 하는데, 며느리가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도 없고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고 했다.

E(62)씨는 며느리가 평소에 통 연락이 없어 불만이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어 "언제 한번 다녀갈 거니" 물으면 "바빠서 못 간다"며 급히 끊는 경우가 대부분. 그는 "며느리가 무심한 것 같아 마음이 상한다"면서도, 최근 시아버지 암 수술에 며느리가 두말없이 수술비를 부담하는 등 집안에 일이 생기면 척척 해결하기 때문에 사소한 불만을 드러내진 않는다. 김선미 교수는 "맞벌이 가정에서 육아를 맡는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들이 많은데, 경제권이 자녀들에게 있어 위축되는 경우도 많다"며 "자기가 좋아 만족할 정도만 해야지,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멘탈 을, 선량한 사람? 나약한 사람!

올해 상반기 중앙대학교병원 신경심리-스트레스 클리닉을 방문한 직장인 환자 중 47.4%가 과도한 업무량 등에 시달리고 있었고, 26.3%는 직장 내 관계 갈등, 18.4%는 직무 불안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테이블'이 인크루트에 의뢰해 214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멘탈 갑에 대한 인식은 '카리스마가 강하다'(22%)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자기밖에 모른다'(24%) '남에게 피해를 준다'(13%) 등 부정적 인식이 더 많았다. 멘탈 을도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47%)이라는 평가와 함께 '나약한 사람'(36%)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높게 나왔다. 가장 흔한 유형의 멘탈 갑 직장인은 '걸핏하면 고성을 지르고 폭언'(33%)하거나 '감당 못할 일을 시켜놓고 분노하는 상사'(33%) 등으로 묘사됐다. 직장에서 흔히 만나는 멘탈 을의 유형은 '감당 못할 일을 다 떠안고 나중에 놓아버리는' 경우(27%)나 '작은 일에도 툭하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26%)들이었다.

직장에서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계약에 의한 것이지만 간혹 이를 넘어서는 정서적 요구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문학과지성사)을 쓴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직장에서 노조도 다루기 힘든 미시적 권력 관계의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며 "평생 직장이 보장됐던 시절에는 견딜 수 있던 일들도 명퇴와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요즘 직장에선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