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 육본 벙커, 이곳서 6·25때 한강다리 폭파 결정했다

입력 2016.07.05 03:00

['110년 외국땅' 용산기지] [下]
美軍기지 내 보존가치 큰 건물 80여동…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숨겨진 역사의 땅

6·25직전 육본 작전상황실로 써… 여기서 박정희·김종필도 첫 만남
흥선대원군이 淸에 끌려가기 전 납치된 淸軍 사령부도 용산에
제대로 된 유적 조사한 적 없어… 공원 짓기 전 역사적 맥락 알아야

1882년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淸)나라 군대가 한양 주변 4곳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지금의 용산 기지 메인 포스트의 캠프 코이너 자리인 청군의 사령부로 끌려왔다가 동작진에서 배에 실려 청으로 압송됐다. 구한말엔 둔지미 마을 등 주민 거주지와 청국 병영이 혼재돼 있던 용산은 1906년 일본에 의해 완전히 외국 군사 기지로 변했다.

대원군 납치 사건을 비롯해 용산 기지에는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지 않거나 숨겨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 적지 않다. 사우스 포스트 남서쪽 121병원 뒤편 언덕에 있는 노란색 건물이 대표적이다. 계단이 외부로도 나 있고 외형은 보편적인 직각 육면체가 아니라 사다리꼴이다. 언뜻 봐도 평상적인 사무실 건물이 아니다. 현재 건물 이름은 사우스 포스트 벙커다. 아스팔트 도로 건너편 잔디밭에는 미군 단독주택 관사가 서 있다. 그 뒤편 숲 덤불 속에는 녹슨 철문이 있다. 숲 뒤편 콘크리트 담장으로 연결된 터널 입구다.

관사가 있는 잔디밭에는 일본군 사령부 청사가 있었고 121병원 자리에는 조선총독 관저가 있었다. 터널은 사령부와 총독 관저를 잇는 지하 터널이었다. 사령부청사는 6·25 때 파괴됐다. 총독 관저는 1960년대 병원 신축으로 철거됐다. 노란색 벙커는 일본군 사령부 작전실이었다. 사령부와 작전실은 광복 후 한반도에 들어온 미7사단이 접수해 사무실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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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공원에 들어설 8개 시설 그래픽

1949년 6월 29일 미 군정이 철수하자 서울 을지로의 신한공사(옛 동양척식회사) 건물을 사용하던 우리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6·25 전쟁 때까지 일본군 사령부를 사용했다. 벙커는 육군본부 정보국 사무실 겸 작전상황실로 사용됐다.

당시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은 육사 8기생들 가운데 우수 장교들을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했다. 장교로는 김종필 소위, 사병으로는 박종규가 있었다.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됐던 박정희는 문관으로 근무했다. 6·25가 터진 날 김종필은 정보국 상황실 당직장교였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서울 사수 결의도, 철수 결의도, 한강 인도교 폭파 결정도 바로 이 일본군 사령부 청사에서 이뤄졌다. 국방부가 펴낸 건군사에도 이 내용이 언급돼 있고 백선엽·김종필 회고록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옛 육본 건물 초석에는 이 사실(史實)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국방부와 육본이 일본군 사령부에서 6·25전쟁을 맞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육본은 1958년 이태원로(路) 건너편에 청사를 신축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1994년 계룡대로 이전했다.

현재 용산 미군 기지엔 1173동(棟)의 건축물과 시설이 있다. 이 중 국토부가 보존·재활용 대상으로 검토 중인 건물은 80여 동이다. 그러나 용산 기지에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숱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다. 전문가들이 공원 개발에 앞서 이곳의 문화·역사적 배경부터 조사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제 강점기 이후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의 저자인 향토사학자 김천수씨는 "용산 공원 역사 발굴 작업을 하면서, 이곳에 맞는 합당한 콘텐츠를 찾아가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며 "시간에 쫓기듯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키워드 정보] 6·25 전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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