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업 페이스북에는 '해카톤(hackathon)'이란 회의가 있다.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다. 임직원이 해킹하듯 도전적으로, 마라톤하듯 끝장 토론 벌이는 장(場)이다. 나이도, 직급도 상관없다. 전원 계급장 떼고 피자 조각 씹으며 토론한다. 창업자 저커버그는 해카톤이 페이스북의 창의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평등과 수평은 모든 기업이 부러워하는 실리콘밸리 문화의 정수(精髓)다.
▶1999년 CJ의 전신인 제일제당은 위기감에 싸여 있었다. 영화 쪽에 새로 진출했으나 상명하복 문화가 콘텐츠 산업과 영 삐걱댔다. 회사가 내린 결단은 호칭 파괴였다. 부장님·상무님 대신 전원 '000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처음엔 다들 어색해 해 제대로 시행되질 않았다. 보다 못한 이재현 당시 부회장이 사내 방송에 나가 젊은 여직원들을 '000님'으로 부르자 그제야 정착됐다. CJ가 아시아 굴지의 콘텐츠 기업이 된 데는 호칭 파괴 덕도 보았다.
▶몇 년 전 다음과 카카오 합병 때 호칭 방법이 이슈가 됐다. 합병 전 다음은 '님'을, 카카오는 영어 닉네임을 썼다. 논의 끝에 결국 카카오 방식이 이겼다. 지금 카카오에 들어오는 신입 사원은 영어 이름부터 지어야 한다. 김범수 의장은 '브라이언', 임지훈 대표는 '지미'다. '제다이'라는 영화 주인공, '조니워커' 같은 양주 이름도 있다. 인터넷 기업 아이브즈넷은 3호, 15호 같은 숫자를 이름 대신 부른다. 입사 순서 번호다.
▶"이 부장님" "김 과장"으로 부르는 직급 호칭은 한국 기업의 100여년 된 전통이다. 대리·과장·차장·부장·임원으로 층층시하 이어지는 사다리 직급도 서구 기업엔 없다. 상명하복 직급 문화가 조직을 정체시킨다. 엊그제 삼성전자가 직급을 없애고 호칭도 '000님'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20세기 초 근대화 이후 이어진 직급 체계가 대한민국 대표 기업에서 사라지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일류 기업이지만 경직된 관료 문화로 유명하다.
▶조직 문화 혁신으로 성장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삼성의 실험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임원과 팀장급을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이상하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는데, 이재용 부회장은 임원 빼고 다 바꾸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삼성은 몇 달 전 기업 문화 혁신을 선언하면서 전 직원을 모아놓고 선포식까지 했다. 엊그제는 전 직원의 동의 서명도 받았다. 목표는 훌륭하지만 추진하는 방식은 아직 군대식이라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