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사직서까지 代筆 맡기는 SNS세대

    입력 : 2016.06.23 03:00

    [짧은 글에 익숙해 긴 글 써본 경험 적어… 대필업체 호황]

    사직서 5만원, 경위서 1만원… 불량 남편 반성문도 대신 써줘
    시장 커져 대필작가협회 생겨

    경기도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신모(28)씨는 이달 초 한 온라인 대필(代筆) 업체에 사직서를 대신 써달라고 의뢰했다. 어차피 그만둘 회사라고 사직서를 성의 없이 대충 썼다가 동종(同種) 업계에 좋지 않은 평판이 돌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경쟁 업체로 이직을 준비하는 신씨로서는 흘려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게 된 배경과 회사 생활을 하며 겪었던 애로사항을 간단히 적은 뒤 5만원을 동봉해 업체로 보냈다. 신씨는 "직접 써보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써놓고 보면 왠지 논리적이지 않고 불평과 짜증만 늘어놓은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서 "글 잘 쓰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몇 만원 주고 해결하는 게 훨씬 속 편하다"고 했다.

    돈을 받고 문서를 대신 작성해주는 대필(代筆) 업체가 호황을 맞고 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같은 단문(短文)에 익숙해 길고 논리적인 글을 써본 경험이 적은 '디지털 세대'가 주된 고객이라고 한다. 취업 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3월 구직자 315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64%가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평소에 글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라는 답이 39%로 가장 많았고, 이어 '독서 부족'(23%), '평소 국어 사용 시 신경을 쓰지 않고 함부로 사용해서'(18%) 등의 순이었다. 대필 업체인 말글커뮤니케이션을 운영하는 김재화 원장은 "2003년에는 인터넷으로 영업하는 대필 업체가 10여곳에 불과했는데, 요즘은 100여개 업체가 왕성하게 활동 중"이라고 했다. 대필 시장이 커지면서 이들을 대변하는 이익 단체까지 생겼다. 지난해 8월 자기소개서와 학술 논문, 학업 계획서 등을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들이 모여 '한국대필작가협회'를 결성했다. 현재 125명이 협회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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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초기에는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자기소개서 위주였던 대필 영역도 연애편지와 탄원서, 사직서, 경위서(시말서)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 인천의 한 중소기업 계약직 사원 윤모(여·22)씨는 지난 17일 온라인 대필 업체에 1만원을 내고 경위서 작성을 부탁했다. 직접 쓴 경위서를 세 차례 퇴짜맞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간단히 적어 보냈더니 1시간쯤 지나 대필 업체가 써준 경위서가 이메일로 도착했다. 윤씨는 "회사들이 나 같은 비정규직 사원의 꼬투리를 잡아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으려고 조금만 잘못해도 경위서를 쓰라고 요구한다"면서 "경위서를 직접 써서 제출할 때마다 '문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퇴짜를 많이 맞아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했다.

    대필 업계에 따르면 최근에는 직장 생활뿐 아니라 가정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문을 대신 써달라고 요청하는 고객도 있다고 한다. 회사원 김모(34)씨는 유흥업소를 자주 다니다 아내에게 들키고서 "이혼하기 싫으면 반성문과 각서를 쓰라"는 주문을 받았다. 김씨는 정모(33)씨가 운영하는 온라인 대필 업체에 작성을 부탁했다. 김씨는 대필 업체가 써준 반성문을 이메일로 받은 뒤 이를 자필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정씨는 "사과문, 진술서, 의견서, 경과 보고서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서 영역에서 대필이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장소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SNS 세대는 감정을 짧은 글로 즉각 표현하는 데 익숙할 뿐 말을 재조립해서 논리적인 글을 쓰는 데는 약하다"며 "글은 쓸수록 느는 것인데, 자꾸 남에게 글을 맡기면 글쓰기 실력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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