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탐욕 시계'

    입력 : 2016.06.17 03:08

    18세기 스위스의 천재적 시계 제작자 브레게가 '투르비용'을 발명했다. 기계식 시계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중력 탓에 위치가 바뀔 때마다 오차가 생긴다. 중력의 영향을 최소화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가 투르비용이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해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한 개 제작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린다. 그래서 손목시계 하나 값이 1억원을 훌쩍 넘긴다.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스위스제 고급 시계는 '역사와 전통'을 같이 판다. 초고가 브랜드에선 가장 싼 '입문용' 손목시계가 800만원대라고 한다. 자동차 값은 물론 우리 전셋값이 넘는 시계도 있다.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을 땐 스마트폰이 최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명품 시계가 팔리는 건 '기능'이 아니라 '격(格)'을 판다는 전략이 먹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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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남자 디자이너는 고장 난 명품 시계를 고치지 않은 채 차고 다니며 '액세서리'라고 했다. 남자들에겐 개성을 드러낼 만한 패션 용품이 시계쯤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명품 시계 소비자의 90%가 남성이다. 그래서 남자의 재력이 궁금하면 손목을 보라는 얘기가 있다. 복잡한 기계에 열광하는 남자일수록 섬세한 기계 장치가 정교하게 움직이는 시계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명품 시계는 뇌물·횡령 사건에 단골로 등장한다. 뇌물 주는 사람이 "격에 맞는 시계를 차라"며 건네기 일쑤다. 지난해 KT&G 민영진 전 사장이 뇌물 혐의로 구속됐을 때 4000만원 넘는 명품 시계 '파텍 필립'이 등장했다. 박기춘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분양업자에게 '위블로' '해리 윈스턴'처럼 하나에 3000만원씩 하는 시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몇 년 전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4000만원짜리 프랭크 뮬러 시계를 줬다고 한다. 부피 작고 환금성(換金性) 좋고 허영심을 만족시키니 이만한 뇌물이 없다.

    ▶5조원대 부실을 감춰 온 대우조선해양의 썩은 치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 회사 임모 전 차장의 돈 빼돌리기엔 입이 딱 벌어진다. 그는 8년 동안 비품 구매 내용을 부풀려 차액을 빼먹는 방식으로 180억원을 챙겼다. 엊그제 경찰이 집에 가보니 명품 시계 10억원어치와 현금·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명품 시계 20여 개 중엔 시가 2억원짜리 스위스제 '바셰론 콘스탄틴'도 있었다. 탐욕과 허영은 죄의식과 수치심도 잊게 만드는 마약이다. 손목에 찬 값비싼 탐욕의 시계가 수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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