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밍키서점'. 색 바랜 중고책들이 사방에 빼곡히 쌓여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연세대 4학년생 김수경(23·영어영문학)씨가 서점 사장 채오식(56)씨에게 온라인 주문 내역을 확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채씨는 고객이 주문한 류시화 시인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2002)를 찾아 박스에 포장한 뒤, 컴퓨터 화면에 나와있는 배송지 주소를 박스 겉면에 옮겨 적었다. 채씨는 "중고책을 찾는 손님이 줄어 걱정이었는데 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후 매출이 조금씩 늘고 있다"며 웃었다.
김씨의 컴퓨터 강습은 연세대 동아리인 '인액터스(enactus)'가 하고 있는 '헌책방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인액터스는 새로운 경영 기법이나 아이디어를 동원해 '청소년 사회 부적응' '발달장애인 식습관 개선' 등 사회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동아리다.
'헌책방 살리기 프로젝트'는 2년 전 인액터스 소속 7명의 학생들이 서울에서 하나뿐인 헌책방 거리가 쇠퇴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책it out'이라는 팀을 만들어 시작했다. 청계천 5~6가 사이의 버들다리부터 오간수교까지 약 300m 구간에 자리 잡은 헌책방 거리는 1960년대 만들어져 한때는 200개가 넘는 서점이 성업했다. 그러나 최근 10~20년 새 종이책 인기가 떨어지고, 온라인 서점이 늘어난 여파로 손님이 줄어 현재는 20여개만 남았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사흘 헌책방을 찾아 네이버·중고나라 등 온라인 사이트에서 중고책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을 돕고 있다. 작년 6월에는 '설레어함'이라는 '중고책 큐레이팅(독자가 관심있는 중고책을 추천해주는 서비스)' 사이트도 만들었다. 주문자가 '수험생입니다. 마음을 잘 다지고 싶을 때 읽고 싶어요' '갱년기예요. 책으로 위로받고 싶어요' 등 추천을 의뢰하면 헌책방 사장들이 이에 맞는 중고책 3권을 1만5000원에 엄선해 보내주는 방식이다.
작년 11월 갱년기로 힘들다는 50대 여성에게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자기 앞의 생' '깊은 밤, 기린의 말'을 골라 보내줬다. '설레어함'이라는 이름은 주문자가 무슨 책이 올지 몰라 설렌다는 의미다.
사이트 개설 초기에는 주문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온라인에 홍보 게시물을 꾸준히 올린 덕에 1년이 지난 지금은 일주일에 30여건의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지난 1년간 설레어함을 통해 3000여권이 팔렸고, 13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처음에 학생들의 시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헌책방 사장들도 이제는 학생들이 오는 시간을 기다린다고 했다. 서문서점 사장 정병호(60)씨는 "어린 학생들이 꾸준히 찾아와 열심히 일도 돕고 성과를 내는 것을 보니 대견스럽고 내 자식 같다"며 "효자가 따로 없다"고 했다.
인액터스 회원 장도련(21·경영학과 3년)씨는 헌책방 살리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 "요즘은 사람들이 쉽게 물건을 사고 빨리 버린다. 중고책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학생들은 예전 책 주인의 추억이 담긴 흔적을 발견하면서 중고책을 더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학생들이 사진으로 찍어둔 한 중고책의 맨 앞장에는 '고마워요, ○○씨 나와 결혼해달라고 말해주어서. 그 순간이 닥치니 머리가 새하얘지더군요. 그때 못하던 말을 이 책으로 대신 전합니다'라는, 색이 바랜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