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소녀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꿈을 심어주고 등대가 되어주었던 세리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1998년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아버지와 함께 TV로 지켜본 이후 골프는 박인비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을 향해 달려왔다. 여자 골프의 새 전설이 된 박인비를 박세리가 뜨겁게 안았다. 여자 골프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두 전설의 포옹이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 1라운드가 열린 10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 사할리 골프장.

두 전설의 포옹 - ‘세리 언니’를 보며 골퍼의 꿈을 키운 박인비가 역대 최연소(27세10개월)로 LPGA 투어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됐다. 1951년 창설된 LPGA 투어에서 25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박인비(오른쪽)가 10일 위민스 PGA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치고 박세리(왼쪽)의 뜨거운 축하를 받았다.

박인비는 올해 10번째로 출전한 대회인 위민스 PGA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치면서 LPGA 투어 명예의 전당 가입 조건을 모두 채웠다. 지난해 명예의 전당 가입 포인트 27점을 모두 딴 박인비는 이날 투어 활동 10년(10년간 10개 대회 이상) 조건을 충족했다.

LPGA 투어 명예의 전당에 새 회원이 나온 것은 2007년 박세리 이후 9년 만의 일이었다. 한때 골프 여제라 불렸던 멕시코의 로레나 오초아는 투어 활동 10년 조건을 채우지 못했고, 대만의 장타자 청야니는 포인트가 부족하다. 통산 스물다섯 번째로 LPGA 투어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된 박인비는 역대 최연소(27세 10개월) 기록도 세웠다. 이전 최연소는 박세리(29세 8개월)였다.

스윙코치로 박인비를 슬럼프에서 구한 남편 남기협(오른쪽)씨와 10년째 캐디를 맡고 있는 브래드 비처(왼쪽)가 축하하며 함께 찍은 사진.

지난 10년 골프를 그만두고 싶다 할 정도로 힘든 기간도 적지 않았다.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우승을 하고는 4년이나 슬럼프에 시달렸다. 영광의 해인 올해에도 허리 부상과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고전하고 있다. 박인비는 이날 가족과 스승, 친지들이 모인 파티에서 "혼자 힘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침묵의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지닌 박인비에게는 엉성해 보이면서도 고성능 유도탄처럼 정확한 샷 능력과 신기의 퍼팅 능력이 있다. 그보다 더 큰 무기는 뚝배기 된장 맛처럼 깊고 구수한 인간관계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우정을 나누며 가족 같은 사이가 된다. 캐디인 호주 출신 브래드 비처는 올해 10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다. 강수연과 정일미의 가방을 멨던 비처는 2007년 LPGA 투어 신인이던 박인비의 백을 들기 시작했다. 비처는 "박인비는 마음이 깊고 변하지 않는 심성을 지녔다"고 했다. 박인비는 3년 전 올해의 선수 시상식에서 "비처는 나에게 캐디 이상의 존재다. 그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 정도로 능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비처는 "인비가 은퇴할 때까지 캐디를 맡고 싶다"고 한다. 박인비가 남편만큼이나 대화를 자주 나누는 이가 있다. 멘털 트레이너 조수경 박사다.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2008년 11월 처음 만났다. 조 박사는 "처음엔 매일 국제 전화를 했고, 8년째 매주 상담을 하는 선수는 박인비가 유일하다"고 했다. 박인비는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행복한 골퍼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골프가 안되는 날에도 웃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고 했다. 매니저인 갤럭시아 SM의 이수정 국장과도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친자매처럼 지낸다. 박인비의 부모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성적보다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아 골프계에서 모범으로 꼽힌다.

박인비는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된 것 이상으로 골프를 통해 맺은 좋은 인연으로 행복을 찾게 된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스윙코치를 하며 박인비를 깊은 슬럼프에서 구출한 남편 남기협씨는 "인비는 사람을 한번 믿으면 거짓말을 해도 믿는다"며 "이런 믿음이 바탕이 돼 믿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어 낸 것 같다"고 했다. 안니카 소렌스탐, 카리 웹, 줄리 잉크스터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 박인비를 포옹하며 축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