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팝 컬처] 기타로 宇宙를 연주할 수 있다면

    입력 : 2016.06.09 03:00

    한국 최초 기타 독집 냈던 이병우… 13년 만에 새 앨범으로 돌아와
    우주 때문에 기타를 치고, 기타로 우주를 연주하는 음악가
    "저를 보낸 우주의 신비에 감사와 원망을 보내며…"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사진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1986년 어느 날 기타리스트 이병우를 처음 만났다.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열린 들국화 공연이었다. 공연 중간쯤 들국화 멤버들이 "오늘의 초대 손님을 모시겠습니다" 하고 무대 뒤로 들어가자 두 남자가 등장했다. 둘 중 한 사람은 다리 한쪽이 불편해 보였다. 그가 이병우였고 다른 이는 조동익이었다. 그해 결성된 듀오 '어떤날'이었다.

    전인권의 절창(絶唱)이 끊긴 뒤 듣는 어떤날의 노래들은 생경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마지막 날의 음악회 같던 분위기는 문득 숲 속 기도회처럼 바뀌었다. 객석 환호에 떠밀린 이들은 게스트임에도 앙코르를 연주해야 했는데, 그때 이병우가 "다들 아시는 곡일 거예요" 하며 기타로 애국가를 연주했다. 이병우가 기타 한 대로 빚어내는 애국가는 격렬한 고요함이었고 고온(高溫)의 냉철함이었다. 어떤날은 음반 두 장으로 17곡을 발표한 뒤 홀연 사라졌다. 조동익은 솔로로 나섰고 이병우는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와 미국 피바디음악원에서 기타를 공부한 이병우는 1989년부터 2003년까지 기타 연주곡집 다섯 장을 내놓았다. 노래 한마디 없이 기타 연주로만 이뤄진 그의 창작곡들은 마치 기타 두 대로 협주하는 것처럼 들렸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한 치 오차 없이 멜로디를 따라가며 화음을 이루는 베이스 파트, 심지어 왼손이 기타 지판을 움직일 때 내는 소음과 이병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까지 악보에 그려진 것처럼 어울렸다. 뛰어난 연주곡은 가사 없이도 곡목을 떠올리게 한다. '비'라는 곡을 듣고 있으면 창문에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물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고, '잠들기 바로 전'을 틀어놓으면 금세라도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다.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태극기만 펄럭이고'라는 곡이 특히 좋았다. 기타 반주에 맞춰 홀로 무심하게 펄럭이는 듯한 오보에 독주를 듣고 있노라면 학교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어떤 이야기로 시나리오라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런 음악을 창작해 온 이병우가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000년대 들어 영화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장화, 홍련' '괴물' '마더' '왕의 남자' '국제시장' 등의 음악을 작곡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음악가로 변신했다. 그러면서 이병우는 좀처럼 새 기타 앨범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음악 앨범을 꾸준히 내지 않았느냐"고 말했지만, 영화 음악가 이병우보다 기타리스트 이병우를 더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그의 과작(寡作)이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일 이병우는 13년 만에 새 기타 앨범을 내놓고 독주회를 열었다. 레퍼토리 대부분이 신곡이었다. 이병우가 작고한 부친을 생각하며 썼다는 곡 '아버지의 편지'는 듣자마자 그 애틋한 마음을 헤아릴 것 같았다. 이 곡에서 반복되는 악절은 아마도 아버지가 편지에서 되풀이해 신신당부한 그 무엇일 것이었다. 이병우는 2003년 앨범 수록곡 '어머니'도 연주했는데, 이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의 서정적인 곡들은 마음속 가야금을 울렸고 그의 속주(速奏)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초음속으로 편대비행하는 제트기 무리를 보는 것 같았다. 새 앨범에는 30년간 무대에서 앙코르로 연주만 해 온 애국가가 마지막 곡으로 실렸다.

    공연에 깜짝 게스트로 전인권이 등장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순서였다. 이병우가 전인권을 공연에 초대했는데 전인권이 이날 아침 "공연도 보고 노래도 한 곡 하고 싶다"고 해서 이뤄진 일이었다. 30년 전 들국화 공연에 이병우가 게스트로 섰고, 30년이 지나서야 이병우 무대에 전인권이 오른 것이다.

    이병우는 한국 최초의 기타 독집 앨범을 냈고 외국에서 클래식 기타를 공부한 뒤 영화 음악을 거쳐 다시 솔로 기타리스트로 돌아왔다. 최근 그는 뜻밖의 구설에 올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그의 공연을 보고 새 앨범을 들으니 "기타 치는 것 외에는 다른 욕심이 없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 앨범 제목은 '우주(宇宙) 기타'다. 앨범 속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지구에서 살아가게 저를 보낸 우주의 신비에 감사와 원망을 함께 보내며, 그래도 저는 우주를 제일 사랑하고 항상 제 옆에 있는 기타와 가족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는 우주 때문에 기타를 치고, 기타로 우주를 연주하려는 음악가인 것이다. 그 연주곡들에서 과연 우주가 떠오르는지, 새 음반을 듣고 또 들을 작정이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