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무부가 1일(현지 시각) 북한을 처음으로 '주요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공식 지정했다. 이날은 리수용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면담한 당일이어서 북·중 관계 개선이 북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대북 제재 약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번 지정은 지난 2월 발효한 대북 제재법에 따른 후속 조치로, 북한의 자금줄을 전방위로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대북제재법은 법 통과 후 180일 이내에 재무부에 대해 북한을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했다. 미 재무부는 이를 근거로 '북한이 돈세탁을 방지하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있고, 미국과의 금융 협조도 일절 없는 데다 정권 생존을 위해 고위 관료들이 불법적이고 부패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주요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이 되면 미국과는 어떤 금융 거래도 할 수 없고, 중국 등 제3국 금융기관도 북한과의 거래가 제한된다. 미국은 조사를 통해 제3국 금융기관이 북한의 실명 또는 차명 계좌를 유지하면 해당 금융기관과의 거래도 중단한다는 방침이다. 사실상 북한이 국제 금융거래 시스템을 이용할 수가 없게 된 셈이다. 재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차단할 것을 공식 촉구했다.
미국이 의회가 요구한 180일보다 훨씬 빨리 북한을 '주요 자금 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한 것은 리수용의 방중(訪中)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오는 6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8차 미·중 전략·경제 대화'를 앞두고 중국에 확실한 메시지를 보내는 측면도 있다. 북한이 비핵화로 나오지 않을 경우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미국 내에서는 이번 조치가 2005년 BDA(방코델타아시아)에 대한 거래 금지 조치보다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소규모 은행인 BDA를 '자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해 거래를 끊은 것과 북한이라는 나라 전체를 지정해 돈줄을 차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북한에는 국제 거래 시스템이 파괴되는 뼈아픈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미 국무부 대니얼 러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도 지난 31일 브리핑에서 "'제8차 미·중 전략·경제 대화'의 핵심 의제는 대북 압박"이라며 "북한이 핵 야망을 포기하도록 제대로 된 압력을 가하는 방안을 '미·중 대화'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유엔의 대북 제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비핵화에 대한 진전 없이 북한에 탈출구를 마련해주는 것 아니냐는 경계의 목소리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러셀 차관보는 "우리가 미·중 대화를 통해 희망하는 성과는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놓고 협상하게끔 합의하는 것"이라며 "중국이 전적으로 협력해준다면 우리의 목적에 빨리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러셀 차관보는 이어 "북한의 비핵화 협상 참여가 북한의 무조건적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북한을 무릎 꿇리려는 게 아니라 정상 상태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고도 했다. 중국에 대해 대화는 가능하지만 확고한 전제는 '비핵화'란 점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 것이다.
'미·중 전략·경제 대화'에는 미국 측에서 존 케리 국무장관, 제이컵 루 재무장관 등이 참석하고 중국에서는 양제츠 외교 담당 국무위원과 왕양 부총리가 나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