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한강, 샘터, 김재순

    입력 : 2016.05.20 03:00

    김수근이 설계한 대학로 샘터 사옥에 찻집 '밀다원'이 있었다.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맛이 좋았다. 통유리창 너머 대학로 사계(四季)를 민낯으로 즐길 수 있어 명소가 됐다. 단골도 많았다. 월간 샘터를 창간한 김재순 국회의장과 고건·서영훈·이세중 같은 명사가 아침마다 만나 담소했다. 그들이 떠나면 승효상·민현식 비롯한 건축가가 모여들었다. 한낮엔 문인과 연극인이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학 갓 졸업해 들어간 샘터에서 백발에 거친 이북 사투리 쓰던 김재순을 어린 기자들은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했다. 국회 갔다가도 반드시 샘터에 들르는 '의장님'이 계단 올라오는 소리만 들려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설가 최인호라도 오는 날이면 사옥에 시가 냄새가 진동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두 양반이 다리 꼬고 앉아 파이프 담배 마주 피우며 껄껄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물상] 한강, 샘터, 김재순
    ▶최인호 말고도 김재순은 문인들을 지독히 사랑했다. 19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할 때 김지하를 초대 편집장으로 영입하려다 폐병 3기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피천득과는 첫눈 오면 서로 전화를 걸어주며 40년 우정을 나눴다. 김승옥·강은교·문정희 같은 이들이 샘터를 사랑방 드나들 듯했고 염무웅·정채봉·김형영이 편집장을 지냈다.

    ▶한강(韓江)이 샘터 기자로 입사한 건 1993년쯤이다.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했던 그녀는 말수가 적어 동갑내기인데도 어려웠다. 한번은 인천 을왕리 바닷가로 기자들이 소풍을 갔다. 둘러앉아 김밥 먹고 노래 부르고 수다 떠는데 한강이 보이질 않았다. 둘러보니 혼자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얼마나 골똘히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해 겨울 한강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붉은 닻'이라는 소설로. 작품에 등장하는 바닷가가 그날 소풍 갔던 을왕리였다.

    ▶돌아보니 샘터 기자로 산 3년 8개월은 축복이었다. 정채봉은 "그 집 댓돌에 신발이 몇 켤레 있는지도 알아야 기자"라고 가르쳤다. 늘 부러웠던 동료 한강은 '작가란 풀 한 포기, 햇볕 한 줌도 예사로 보지 않는 사람'임을 일깨웠다. 사흘 전 맨 부커상 거머쥐고 활짝 웃는 한강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낮게 뜬 눈, 느릿한 말투만큼이나 선하고 고운 그의 심성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김재순 의장은 한강이 상 받은 날 오후 세상을 떴다. 수상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샘터 꼬마 기자가 나이 마흔 넘어 당신을 인터뷰하러 간 날 "(내 모습이) 아직 연애할 만허우?" 하며 파안대소하던 호랑이 할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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