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지뢰(매설 지역임).' 인기척은 없고 녹슨 철조망이 길게 이어져 땅을 갈라놓고 있었다. 곳곳엔 노란 바탕에 빨강과 검정으로 쓴 지뢰 경고문이 설치돼 있었다.
16일(현지 시각) 찾은 이스라엘 동쪽 요르단 국경 지대의 '카스르 알야후드'는 남북한을 가르는 비무장지대(DMZ)를 연상시켰다.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영토인 이곳은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의 무대였다. 이스라엘군은 당시 이곳을 점령하고, 요르단군의 탱크 공격을 막기 위해 지뢰밭을 만들었다. 양국은 1994년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묻은 지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날 "2년 안에 카스르 알야후드 지역에 남아있는 대전차·대인 지뢰 4000여 개를 완전히 제거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아직도 치열한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두 나라가 설치된 지 50년이 다 돼가는 이 일대 지뢰를 제거하기로 한 것은 이곳이 기독교 성지(聖地)로 해마다 순례객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어 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지뢰밭 사이로 난 안전 통로를 따라 국경 코앞까지 다가가자 허물어진 교회와 수도원 여러 채가 눈에 띄었다. 그 아래로 폭 5~10m 정도의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강 건너편이 요르단이다. 경계 근무 중인 이스라엘 여군은 "기독교의 메시아(구세주)인 예수가 2000년 전 이곳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어 해마다 순례객이 몰린다"고 했다. 하얀 옷을 입은 러시아정교회 교인 8명이 강으로 내려와 침수하며 세례식을 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스라엘 고고학청에 따르면 연간 신자 약 3만명이 카스르 알야후드를 찾는다. 작년 5월 샬럿 공주가 태어났을 때 영국 왕실은 집사를 보내 이곳 물을 길어 유아 세례를 치렀다. 이스라엘 국가지뢰청(INMAA) 아리엘라 하페즈 대변인은 "이번 합의로 전쟁과 분쟁의 지역이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지뢰 제거는 미국과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할로 트러스트(HALO Trust)'가 맡는다. 사업비는 미국 교회들의 후원금으로 조달하게 된다. 이 단체 로넨 시모니 대표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이 지역 땅 136에이커(55만㎡)는 6일 전쟁 이후 50년 가까이 버려진 것과 다름없이 방치돼왔다"면서 "이번 프로젝트를 마치면 이 지역 교회와 수도원이 살아나고 순례객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엔 에티오피아·러시아·루마니아 등 정교회 건물 다섯 채가 있지만, 지뢰 폭발 위험으로 모두 문을 닫은 상태다.
유엔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역엔 100만개가 넘는 지뢰가 설치돼 있다. 요르단 강 일대와 레바논·시리아 국경인 골란고원이 주요 매설지다. 지난 2010년엔 당시 열한 살 이스라엘 소년 다니엘 유발이 골란고원에서 가족과 함께 놀다가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는 사고가 있었다. 이후 유발 가족이 펼친 '지뢰 제거' 캠페인이 범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정부도 지뢰 제거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는 "가자(Gaza) 지구 등지에서 여전히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양측이 제한적이나마 지뢰 제거라는 평화적 사업에 힘을 모으기로 한 데 의미가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