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 시각) 오전 미국 워싱턴DC 의회 의사당 주변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의회경찰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인종차별주의자는 물러나라"는 시위대의 구호가 점점 커졌고, 방송카메라 등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지도부를 만나는 날이었다. 의회전문지인 '더 힐'은 이 상황을 "트럼프님께서 도시를 방문하셨다"고 묘사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트럼프가 의회를 접수하러 온 날"이라고 했다. 민주당 연방하원 의원인 스티브 코헨(테네시)은 "한바탕 쇼가 펼쳐지고 있구나"라며 사무실로 향했다.
트럼프는 이날 오전 라인스 프리버스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의 주선으로 당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연방하원 의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2시간 넘게 진행된 회동을 마치고 나서 당의 화합을 위해 협력하기로 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솔직히 일부 차이점이 있지만, 많은 중요한 영역에서 공통점을 인식했다"며 당의 통합과 대선 승리를 위한 작업에 전적으로 헌신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대변되는 '오바마 백악관'이 4년 더 연장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모든 공화당원이 공통의 가치와 원칙을 중심으로 단합하고 보수의 어젠다를 진전시켜 나가며 올가을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두 사람은 "전례 없이 수백만 명의 새로운 유권자가 공화당 예비선거에 참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오늘 비록 첫 회동이었지만, 당의 통합을 위한 매우 긍정적인 발걸음"이라고 자평했다. 공화당의 대권과 당권을 거머쥔 두 사람이 합의점을 찾으면서 극심한 갈등상을 노출했던 공화당은 안정궤도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 등은 두 사람의 만남이 상당히 진지했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평소답지 않게 라이언의 말을 정중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공화당의 한 관계자는 "트럼프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고, 친절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고 했다. 라이언 의장도 트럼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정 건전성에 관한 도표와 슬라이드까지 만들어 오는 등 정성을 쏟았다. 트럼프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라이언 의장과 많은 현안에 대해 의견 일치를 봤다"며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라이언 의장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나 "트럼프와 내가 이견이 있다는 점은 비밀이 아니다. 우리를 함께 묶어줄 핵심 원칙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음 단계는 공통점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 정책적 이견을 조율하는 일로, 라이언 의장은 "양측 정책팀이 구체적 내용을 다루기 위해 만날 계획"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날 연방상원도 사실상 '접수'했다. 라이언 의장을 만나고 나서는 길 하나를 건너 미치 맥코널 연방상원 다수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를 만났다. 맥코널 원내대표는 "트럼프와의 만남이 상당히 건설적"이었다고 했다. 이후 트럼프는 자신의 선거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유명 로펌인 존스 데이를 들른 다음 이날 오후 전용기를 타고 사라졌다.
이날 의사당 방문이 트럼프의 성공적인 의회 데뷔임에도, 이제 시작이라는 관측이 대다수다. 라이언 의장은 이날 트럼프 지지를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트럼프를 만나고 나서 힘을 얻었다(encouraged)"고만 했다. 폴리티코는 "최소한 겉으로는 화합을 시도하지만, 라이언 의장과 트럼프가 결코 비슷한 부류가 될 수 없다"며 "어색한 춤(awkward dance)을 추고 있다"고 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을 비롯한 무역정책을 포함해 재정·이민·복지·외교 등 전 분야에 걸쳐 조율이 필요하고, 트럼프의 분열적 선거운동 방식도 고치지 않으면 양측의 공존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어떻게든 양측을 갈라놓으려고 애썼다. 민주당 측은 "라이언 의장이 트럼프를 공개 지지하지 않았고, 공화당은 여전히 트럼프가 너무 위험 요소가 많다고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