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逸民) 방우영(方又榮)은 조선일보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96년 조선일보 역사의 3분의 2를 조선일보와 함께했다. 그 64년 세월은 한국 언론이 겪고 이룬 고난과 성취의 역정(歷程) 자체다. 그는 한국 신문이 지켜야 할 두 가지 원칙을 실천으로 보여줬다. 하나는 재정적으로 독립해야만 언론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문 제작은 기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방우영은 스스로를 언론인이 아니라 신문인이라고 불렀다. 기자들이 기사와 지면 제작에 전념하도록 받쳐주며 신문의 바깥을 지키는 경영자라는 뜻이다. 그는 일생을 그 일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이자 영예로 여겼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조선일보와 한국 언론은 한 시대를 마감했다.

방우영은 1952년 5월 조선일보에 입사해 공무국에서 기사 원고를 들고 납 활자 뽑는 일부터 시작했다.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사주(社主)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의 손자였기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에야 편집국으로 들어와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뛰었다. 기자로 사건 현장을 더 누비고 싶었지만 방계회사 아카데미극장을 맡아야 했다. 조선일보 경영이 어려워 다른 수입원 삼아 벌인 극장 사업이었다.

방우영은 외국 영화만 상영하던 아카데미극장을 한국영화 전용관으로 바꾸고 신성일·엄앵란의 청춘 영화 전성시대를 열었다. 아카데미극장은 12개 개봉관 가운데 최고 좌석 점유율을 올렸다. 그는 극장 경영을 바로 세운 뒤 1962년 형 방일영(方一榮) 대표의 부름을 받아 조선일보 상무로 돌아왔다.

방우영은 어려운 신문사 살림을 도맡아 빚과 세금 독촉을 막아 내느라 혼자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는 제약회사와 극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사정해 광고를 받아 왔다. 새벽에는 신문 발송 차량도 몰았다. 방우영은 두 달 뒤 발행인을 맡으면서 “제호(題號)만 빼고 다 바꾼다”고 선언했다. 편집국 세대교체를 밀어붙이고 실력 있고 패기 넘치는 기자들을 데려왔다. 신문의 승패는 편집에서 갈린다는 것을 깨닫고서 유능한 편집 기자들을 스카우트해 중용했다. “일등 신문 만들려면 일등 기자를 데려와 일등 대접하면 된다”고 믿음에서였다.

방우영은 한 해 절반쯤을 기자들과 어울려 지냈다. 스스럼없이 소주잔과 막걸리잔을 나눴다. 그는 글쟁이들의 반항적인 기질을 좋아했다. 기자는 글과 실력으로 승부하고 옳은 소리를 해야 기자답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면 사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올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밤새 특종 기사를 찍어낸 뒤 새벽에 기자들과 함께 청진동 해장국집에 몰려간 일들이 신문 인생에서 제일 즐거웠다고 했다.

정권들은 툭하면 융자금을 회수하겠다거나 신문 용지 공급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논조가 거슬리면 필진을 바꾸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방일영·우영 형제는 5·16 후 ‘군정(軍政) 연장 반대’ 사설을 밀어붙였다. 1964년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려고 언론윤리위원회법를 만들자 26개 언론사 발행인들이 모여 찬반 투표를 했다.

방우영은 투표장을 나서면서 기자들에게 말했다. “조선일보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재고로 가진 신문 용지가 20일치밖에 안 됐지만 반대표를 던진 4개 신문 대열에 섰다. 은행 융자 회수부터 용지 공급과 광고 중단까지 갖은 보복이 쏟아졌다. 형제는 신문사 문을 닫을 각오로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언론윤리법을 철회했다.

방우영은 열세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 다섯 살 위 형을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 세상에서 형님처럼 어렵고 무서운 분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형제가 같은 밥자리·술자리에 앉을 때면 동생은 꼭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형 앞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도 보인 적도 없었다. 설날이면 형에게 큰절을 빼놓지 않았다. ‘언론 파동’ 직후 방일영은 건강을 핑계로 회장으로 한발 물러나고 방우영에게 대표이사 사장을 물려줬다. 통 크고 포용력 넓은 형은 동생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배포 든든하고 추진력 강한 동생은 형을 믿고 일했다. 조선일보의 새 시대를 연 절묘한 이인삼각(二人三脚)이었다.

방우영은 군사 독재 정권 시대 기자들이 수사기관에 끌려가면 쫓아가 백방으로 부탁해 풀어내곤 했다. 그 스스로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불려갔고 청와대 경호실 조사도 받았다. 그는 조선일보의 가장 큰 재산이 인재라고 했다. 경영 정신으로 ‘재정 독립’과 ‘공존공영’을 내걸어 사원들이 이룩한 성과는 사원들에게 돌려줬다.

위에서 아래까지 똘똘 뭉쳐 뛴 조선일보는 1970년대 일등 신문으로 올라섰다. 방우영이 상무로 경영에 참여했을 때 10만부를 밑돌던 발행 부수가 1979년에는 100만부, 1991년엔 200만부를 넘어섰다. 그는 1993년 조카 방상훈(方相勳)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회장이 됐다. 2003년엔 명예회장에 추대되며 41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방우영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1975년 기자 서른 명이 언론 자유를 외치며 신문 제작을 거부하다 회사를 떠난 일이다. 그는 이 사태가 “두고두고 마음의 멍에로 남았다”고 했다. 신문사가 재정 자립을 해야 한다는 쓰라린 교훈을 새삼 되새기는 계기이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이 조선일보 세무조사에 나서자 그는 “가마니 깔고 신문 만들 각오였다”고 했다. 정권은 대북정책을 비판한 논설진을 교체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방우영은 모교(母校)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1981년부터 연세대 동문회장과 재단이사장을 각각 16년씩 맡아 봉사했다. 동문회장 때는 동문회가 학교 일에 간섭하거나 청탁하는 일을 엄금했다.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는 동문 모임마다 쫓아다니며 기금 100억원을 모으고 기념관을 세웠다. 재단이사장을 하면서는 인사권을 총장에게 일임했다. 학교 사업에선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해 새로운 세브란스 병원을 짓고 인천 송도 국제캠퍼스를 성사시켰다. 그러면서도 이사장에게 나오는 차량·보수·법인카드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방우영은 “부장은커녕 차장 한번 못 해보고 기자를 그만둔 게 한(恨)”이라며 웃곤 했다. 그는 팔순이 돼서야 “실은 편집국장이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기자 대신 길고도 모진 신문 경영의 길을 걸어야 했다. “밤새 전쟁하듯 만든 신문이 아침마다 배달되면 독자들이 조선일보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 떨렸다”고 했다. 그래서 팔순 회고록 제목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로 붙였다.

방우영은 어머니가 1973년 영면하시기까지 식탁에서 간곡하게 기도하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주님, 조선일보와 우리 아들 형제를 보살펴주시고 잘되게 해주십시오.” 그는 어머니 기도가 그를 키웠고 기도의 힘이 아니면 인생의 무수한 고비를 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는 64년 전 입사하던 때처럼 찬란한 5월에 떠났다. 그리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다. 방우영은 몸집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보듬고 품는 큰 나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