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17] 다람쥐 수출… 한때 年 30만 마리까지 "강원도 다람쥐, 전 세계서 재롱떤다"

입력 2016.05.04 03:00

달러만 벌 수 있다면 개구리, 쥐털에서 메뚜기, 독사, 소변까지 닥치는 대로 수출하던 1960년대, 대한민국의 수출 품목에 하나가 추가됐다. 살아있는 다람쥐였다. 1962년 4월 4일 애완용으로 일본에 655마리를 수출한 게 시작이었다. 첫 수출 가격은 마리당 1달러였다.(조선일보 1962년 4월 5일 자) 한국 다람쥐는 중국산보다 예쁘고 재롱을 잘 부려 수출량은 급상승했다. 절정기인 1970년엔 30여만 마리를 수출했다. 꽤 중요한 수출품이 됐다. 초기 '물량'의 대부분은 강원도산이었다. 이 지역 화전민들이 다람쥐 찾아내는 데 귀신이었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화전민들은 오래전부터 다람쥐 소굴을 찾아내 다람쥐들이 저장해 놓은 옥수수, 알밤, 벼 이삭 등을 꺼내 먹어 왔기 때문이다. 운 좋게 큰 굴 하나만 찾아내면 두세 가마니의 식량을 얻었다. 다람쥐가 돈이 된다고 하자, 화전민들은 다람쥐 굴 속에 저장된 곡식뿐 아니라 그곳에 우글거리는 다람쥐 새끼 수백 마리도 자루에 넣었다.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니라 '다람쥐 잡고 곡식 뺏고'였다.(경향신문 1962년 5월 20일 자)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농촌의 이색 수출품들을 ‘달라 박스’라고 소개한 1969년 신문기사. 맨 첫머리에 ‘다람쥐’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일보 1969년 4월 22일 자)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농촌의 이색 수출품들을 ‘달라 박스’라고 소개한 1969년 신문기사. 맨 첫머리에 ‘다람쥐’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일보 1969년 4월 22일 자)

수출된 다람쥐들은 쳇바퀴를 돌리거나 외국인 품에 안겨 재롱을 떨었다. 약간의 훈련을 받은 놈들이 재롱을 잘 떨어 몸값도 비쌌지만, 국내에선 훈련시킬 여건을 못 갖춰 야생 그대로 헐값에 수출했다. 일본의 업자들은 한국산 다람쥐들을 훈련시켜 비싼 값에 동남아, 서구 등에 재수출했다. 강원도에서 출생해 일본에서 교육받은 다람쥐들이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은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가정집에서 열심히 재롱을 떨었다.

다람쥐 수출 시대가 열리자 전북 무주구천동 등 다람쥐 서식지마다 포획꾼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농촌 부녀자들도 농사보다 더 짭짤하다며 뛰어들었다. 다람쥐는 장난을 좋아해 낚싯대에 올가미를 달아 들이대면 스스로 목에 걸기도 했는데, 이때 낚아채는 방법을 많이 썼다. '꾼'들은 하루 30여 마리는 잡았다. 한철 1000여 마리를 잡아 논 마지기를 마련한 사람도 있었다. 어떤 업자는 무인도에 사육장을 꾸며 인공 사육도 했다. 상공부가 1970년 7월 청와대 '수출확대회의'에 보고한, 새롭게 시장을 개척한 수출 상품 21개 중엔 일본에 수출한 일장기, 호주에 수출한 낚싯바늘과 함께 벨기에에 수출한 다람쥐가 포함됐다.

그러나 국내에 400만 마리쯤 됐던 다람쥐를 한 해 수십만 마리씩 잡다 보니 '씨가 마르겠다'는 우려가 일어났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1971년 다람쥐 수출량을 한 해 10만 마리로 제한하고 9월, 10월에만 잡게 했다. 그래도 돈에 눈먼 업자들은 밀수출까지 했다. 1971년 어느 업자는 다람쥐를 10만 마리나 밀수출하다 붙잡혔다. 한 신문은 '다람쥐보다도 못한 자'라고 꾸짖으며 "밀수출된 다람쥐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유형(流刑)의 땅에서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못 비장한 필치로 칼럼을 썼다. 자연보호, 동물 보호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산림청은 마침내 1991년 1월 다람쥐 포획을 전면 금지했다. 먹고살기 위해 야생 동물을 잡아 수출했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즐겁게 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애완동물을 엄청나게 수입한다. 지난 4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2015년 애완용 등으로 수입한 포유류·조류는 무려 162만8000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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