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개화파 오경석이 지녔던 휴대용 해시계 발견

조선일보
  • 허윤희 기자
    입력 2016.05.02 03:00 | 수정 2016.05.02 07:29

    日교토 개인소장자에게서 찾아 당대 최고 시계제작자 강건 제작
    오경석 所藏이란 친필도 적혀… 다림대·추 있어 "최소 보물급"

    조선 후기 명신인 강세황(姜世晃·1712~1791)의 증손자이자 당대 최고 시계 제작자였던 강건(姜湕·1843~1909)이 만들고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 소장했던 최상급 휴대용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오경석은 북경(北京)에 13차례나 드나들며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쓴 선각자. 골동 서화(書畵)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그가 당시로선 최신 첨단 기기였던 휴대용 해시계를 소장했을 정도로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고 신제품을 남들보다 빨리 경험하는 사람)'였음을 보여준다. 휴대용 앙부일구는 국내외에 10여점만 남아 있다.

    전윤수 중국미술연구소 대표는 "이 휴대용 앙부일구를 일본 교토의 개인 소장자에게서 찾았다"며 1일 본지에 공개했다. 휴대용 앙부일구는 상아로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다림대(수평을 잡는 역할을 하는 기구)에 추까지 달려 있다. 전 대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852호 휴대용 앙부일구는 다림대와 추가 없어진 상태다. 그보다 보존 상태가 훨씬 더 좋아 최소 보물급"이라며 "일본 내 이름난 컬렉터인 소장자가 40~50년 전 일본 고(古)미술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자자손손 영원히 보관하며 사용하라"

    크기는 가로 4.7㎝, 세로 8.9㎝, 높이 2.9㎝. 바닥면에 강건의 친필로 '광서원년을해맹추하한(光緖元年乙亥孟秋下澣) 진양후인 강건수제(晋陽後人 姜湕手製)'라고 썼고 강건의 도장이 찍혔다. 1875년 을해년 초가을 하순에 진주 강씨인 강건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옆면에는 '해주오씨천죽재진장(海州吳氏天竹齋珍藏)'이라 적혔다. 천죽재는 오경석의 호. 해주오씨 오경석 소장(所藏)이라는 뜻으로 오경석이 직접 썼다. 반대쪽 면에는 역시 오경석의 친필로 '자자손손 영원히 보관하며 사용하라(子孫永保用之)'고 쓰고 오경석의 낙관이 찍혔다.

    위 사진은 역관 오경석이 소장했던 최상급 휴대용 앙부일구. 다림대(사진 속에서 길게 세워진 부분)에 추까지 남아 있는 등 보존 상태가 좋다. 왼쪽 아래는 1872년 베이징에서 프랑스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이 찍은 오경석 사진. 오른쪽은 오경석이 유물 옆면에 직접 쓴 글씨. ‘해주오씨 오경석 소장’이란 뜻이다.
    위 사진은 역관 오경석이 소장했던 최상급 휴대용 앙부일구. 다림대(사진 속에서 길게 세워진 부분)에 추까지 남아 있는 등 보존 상태가 좋다. 왼쪽 아래는 1872년 베이징에서 프랑스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이 찍은 오경석 사진. 오른쪽은 오경석이 유물 옆면에 직접 쓴 글씨. ‘해주오씨 오경석 소장’이란 뜻이다. /전윤수 대표·RHK 제공

    실물을 살펴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손안에 딱 들어가는 크기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든 최상급 수공예품"이라며 "당시에 이런 최고급 휴대용 시계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은 왕실과 고위 관료 등 극소수였다. 아마도 주문 제작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경석과 강건 모두 당대 명사였기 때문에 둘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명품 기기에 대해 감각이 있었던 오경석이 강건에게 주문해서 제작, 소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안 교수는 "오경석이나 강건 모두 글씨의 품격을 흉내 내기 힘들 정도로 매우 잘 쓴 글씨"라고 했다. '진주강씨 가문의 해시계 연구' 논문을 발표한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박사는 유물 사진을 검토한 후 "지금까지의 휴대용 앙부일구가 직사각형인 것과 달리 이 유물은 아랫면이 오목하게 파인 독특한 형태다. 또 대부분 휴대용 앙부일구는 30분 간격으로 시각선이 그어져 있지만 이것은 15분 간격의 시각선이 그어져 있어 시간을 좀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했다.

    오경석은 19세기 '얼리어답터'

    오경석은 흔히 유대치·박규수와 함께 '우리나라 개화파의 시조'라 불린다. 역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3세 때인 1853년 처음 북경에 가서 또래 청나라 지식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북경에 갈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았고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골동 서화를 구입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가 북경을 왕래하며 기록한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에는 골동 서화 구입과 관련한 기록이 많은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들인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이 지은 '근역서화징'에 일부 인용돼 남았을 뿐이다. 서예가이자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오세창은 아버지 오경석이 수집한 골동 서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서체를 확립했고 우리나라 서화사를 집필했다.

    제작자인 강건도 명문가 집안이었다. 역시 시계 제작자로 이름 높았던 형 강윤(姜潤·1830~1898)과 함께 형제가 차례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을 정도다. 이들의 증조부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이다. 두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건의 두 아들도 가업을 이어 해시계를 제작했다. 김상혁 박사는 "중인 출신의 기술자가 아닌 명문가의 3대가 조선 후기 명품 휴대용 해시계의 전통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 세종 때의 대표적인 해시계로 조선 후기에 오면 휴대용으로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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