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귀화한 빙판위의 외인부대

25일 폴란드 카토비체 스포덱 아레나. 폴란드 관중 7000여명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KOREA' 사인을 달고 도열한 선수 사이로 백인 선수 6명이 눈에 들어왔다.
2013년부터 하나둘씩 귀화해 이제는 한국 대표팀 주축이 된 선수들이다.

한국 귀화한 빙판위의 외인부대

입력 2016.04.26 08:48 | 수정 2016.04.26 09:13

강태산·라동수·한라성…아이스하키 '푸른눈의 6인조'

경기 시작 전 양팀의 국가가 연주되는 다른 종목과 달리 아이스하키는 경기가 끝나고 오로지 승자의 국가만 연주된다. 치열한 빙판 위 혈전(血戰)의 전리품이다.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25일 열린 세계선수권대회(디비전1A·국가 대항전 2부 리그 격) 2차전에서 개최국 폴란드를 4대1로 꺾었다.

'귀화' 맷 달튼 "한국 아이스하키를 변화시킨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거리에서 만나면 한국에서 일하는‘원어민 영어 교사’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 25일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에서 개최국 폴란드를 꺾은 뒤 태극기와 함께 포즈를 취한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외인부대 6명. 왼쪽부터 달튼, 테스트위드, 라던스키, 리건, 스위프트, 영이다. /임경업 기자

'KOREA' 사인을 달고 도열한 선수 사이로 백인 선수 6명이 눈에 들어왔다. 2013년부터 하나둘씩 귀화해 이제는 한국 대표팀 주축이 된 선수들이다. 브락 라던스키, 맷 달튼, 에릭 리건, 마이크 테스트위드(이상 안양 한라), 브라이언 영, 마이클 스위프트(이상 고양 하이원) 이야기다.

이들은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다. 경기가 끝나고 폴란드 현지 기자들조차 자국팀보다 이날 해트트릭을 달성한 스위프트에게 몰렸다. '한국에서 뛰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스위프트는 "큰 영광(great honor)이다. 한국말도 배우는 중"이라고 답했다. '김치를 먹어봤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올림픽 아이스하키는 한 팀이 최대 22명이며, 빙판에는 돌아가면서 6명씩 선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 빙판에 나온 한국 대표팀 선수 6명이 전원이 백인인 진풍경도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달튼은 "올림픽 무대는 모든 선수의 꿈"이라며 "평창 빙판을 가르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선수들도 모두 평창올림픽 출전을 꿈꾸고 귀화를 결심했다. 이 중 브라이언 영은 세계 최고 무대인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을 경험해봤고, 다른 선수들은 NHL의 하부 리그인 AHL과 유럽 무대에서 뛰다 특별 귀화했다.

'올림픽용 귀화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태극 마크에 대한 긍지가 없거나 한국이라는 나라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최근 안양 한라의 아시아리그 우승 파티에선 흥이 오른 달튼과 리건이 어깨동무를 하고 애국가를 열창했다. 테스트위드는 특별 제작한 스틱에 태극기를 새겨넣었다. 라던스키는 영어 강사인 아내와 딸과 함께 한국에 산 것이 8년째다.

폴란드전 승리 후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 부르는 한국팀의 골리 맷 달튼.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이들은 '김치볶음밥'을 즐겨 먹을 만큼 한국에 적응했다. 한글 메뉴판을 읽고 주문할 만큼 한국어도 늘었다. 몇몇 선수는 어른을 보면 모자를 벗고 인사해 '한국 사람 다 됐다'는 말을 듣는다.

백지선 대표팀 감독은 "핏줄보다 대표팀에 대한 긍지와 헌신이 중요하다"며 "아이스하키는 이미 국적의 경계가 사라진 스포츠"라고 했다. 유럽 아이스하키 강국에는 많은 북미 선수들이 귀화해 활약하고 있다. 지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일본 대표팀 중 8명이 귀화 선수였다.

한국은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놀라운 선전을 계속하고 있다. 1차전에선 유럽의 강호 오스트리아와 연장까지 2―2 접전을 벌인 끝에 승부치기에서 2대3으로 패해 승점 1을 얻었다. 이 대회 참가국 6개 팀(한국·일본·오스트리아·폴란드·슬로베니아·이탈리아) 중 세계 랭킹이 제일 낮은 한국(23위)의 반란이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관계자들도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놀라고 있다.

폴란드전에서 3골을 넣은 스위프트는 오스트리아전 1골을 합해 대회 득점 선두(4골)를 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귀화한 골리(골키퍼) 맷 달튼도 신들린 선방으로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지금까지 72개의 상대 슈팅 중 4골만 허용했다. 달튼은 1차전 MVP(최우수선수), 스위프트는 2차전 MVP로 선정됐다.

승점 4로 6개 팀 중 3위인 한국은 26일(한국 시각) 일본과 운명의 일전을 겨룬다. 한국은 1982년 세계선수권 이후 일본을 상대로 34년간 1무19패를 기록 중이다. 일본을 꺾고 조 2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한국은 아이스하키 역사상 최초로 16개 팀으로 구성된 '세계 1부 리그(탑디비전)'에 들어가는 기적을 이루게 된다. 평창을 향한 질주가 시작되고 있다.

"한국에 동계올림픽 메달 선물할게요"


외국인 선수들이 태극 마크를 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수확에 나선다.

법무부는 캐나다 출신 아이스하키 선수 맷 달튼(30)과 에릭 리건(28), 러시아 출신 바이애슬론 선수 스타로두베치 알렉산드르(23)와 플로리나 안나(여·32) 등 체육 분야 우수인재 4명의 특별귀화를 허용한다고 31일 밝혔다. 우리 국적법은 과학·경제·문화·체육 등 특정 분야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의 특별귀화를 허용한다.

귀화 아이스하키 선수 달튼과 리건 /연합뉴스

국내 아이스하키 실업팀인 안양 한라 소속인 달튼과 리건은 유럽 리그에서도 인정받는 선수다. 달튼은 유럽대륙하키리그(KHL)에서 소속팀의 주전 골키퍼로 뛰었고, 2014년 국내팀에 입단해선 2014~2015 시즌 아시아리그 베스트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했다. 리건은 독일 아이스하키 1부리그에서 수비수로 활동하다 2014년 국내팀에 입단해 2014~2015 시즌 정규리그 46경기에서 17골 3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베스트 디펜스 상을 받았다. 이로써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귀화 선수는 6명으로 늘었다.

키 작아 못한다고? 아이스하키는 깡이야"


"처음엔 대표팀이 아니라 유치원 아이스하키 클럽에 온 줄 알았습니다."

2014년 7월 한국 남자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게 된 백지선(49)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표팀 운동복에 슬리퍼를 신고 거리로 나서는 선수들, 장비가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라커룸.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 스타였던 그로선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팀에는 패배주의가 만연했고 선수들에겐 국가대표의 긍지나 승리에 대한 열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2014년 경기 고양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전 전패를 당해 디비전1A(국가대항전 2부리그)에서 디비전1B(3부)로 강등된 직후의 일이었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HHF)에선 평창 올림픽 때 한국의 개최국 자동 본선 진출을 허용할 것인지 고민할 정도였다. "민망한 스코어가 나올 수 있다"는 이유였다.

'짜릿한 우승' 백지선, "선수들 모든 역량 쏟아냈다"
남자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백지선 감독이 2016년 4월 11일 경기 안양종합운동장 실내빙상장에서 대표팀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백 감독은 작은 것들부터 바꿔 나갔다. 라커룸에 태극기를 걸고, 모든 장비와 유니폼을 '각' 맞춰 정리하도록 했다. 경기장 이동시엔 짧은 거리라도 반드시 정장에 넥타이를 하도록 했다. 훈련에 지각하는 선수는 아무리 뛰어나도 선발하지 않았다. "대표팀에 대한 존중(respect), 우리가 최고라는 긍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렇게 기강을 다시 세운 대표팀은 강등 8개월 만인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에서 디비전1A로 다시 올라갔다.

안양빙상장에서 훈련 중인 백지선 감독을 최근 만났다. 손을 맞잡자 강한 아귀힘이 느껴졌다. 백 감독은 '짐 백(Jim Paek)'이라는 이름으로 NHL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백 감독은 한국계로선 최초로 세계 최고 수준인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무대를 밟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수비수로 뛴 그는 NHL에서 통산 217경기를 뛰면서 34포인트(5골 2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피츠버그 펭귄스 시절에는 1991·1992년 스탠리컵(챔피언 결정전)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은퇴 후 NHL 최고 명문 팀 중 하나인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산하 마이너 팀에서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백 감독은 지난해 7월 말 한국 남녀 아이스하키를 이끌 총감독으로 임명됐다.

“우린 국가대표다” - 유치원 같다던 대표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백지선 감독은 라커룸부터 바꿨다. 태극기를 걸고 선수들의 장비가 가지런히 정돈된 현재 대표팀 라커룸의 모습.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제공

백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두 자릿수대 외국인 선수 귀화를 추진하려던 국내 관계자들에게 "아이스하키를 2018년 평창까지만 하고 그만할 거냐. 국내 선수를 더 키우고, 한국만의 색깔을 가다듬는 게 더 중요하다"며 외국 선수 귀화를 최소화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가 대표팀 총감독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서 주니어 선수 육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한국 아이스하키의 미래를 위한 열정 때문이다. 그는 "주니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선수가 여럿 있다"며 한국 아이스하키의 미래를 밝게 봤다.

평창 돌풍 꿈꾸는 얼음판 사령관

'한국 선수는 체구가 작아 불리하지 않으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Stop(그만)!"하며 말을 끊었다. "하키는 하트(Heart)로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안 된다는 인식부터 부숴야 합니다." 하키는 체격이 아니라 용기와 배짱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다. 그는 "작은 체구의 우리 선수들은 2m 가까운 상대방에게 몸싸움을 건다"며 엄지를 세웠다. 그가 이끄는 팀의 모토는 "Win All Battle(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라)"이다. 경기 스코어뿐 아니라 몸싸움, 마음가짐에서도 승자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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