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이 아니라 지옥"… 벽화 지우는 벽화마을 사람들

입력 2016.04.26 03:00

[서울 종로 이화마을 해바라기·잉어계단 사라져… 무슨 일이]

벽화 지운 주민 "재개발 못하고 소음·쓰레기 때문에 못살겠다"
상당수 주민 "동네 깨끗해지고 집값 오르는 등 좋은 측면 있어"

- 이화 벽화마을은
정부 2006년 낙후지역 개선위해 벽화 16점 그려… 한류 관광코스
관광객 몰려 카페 속속 들어서

2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휴대폰 카메라를 든 중국인 관광객 량모(34)씨가 좀처럼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량씨가 한국에 오기 전 인터넷에서 미리 찾아봤던 벽화 '해바라기 계단'은 온데간데 없고 계단이 회색 페인트로 덧칠된 상태였다.

계단 옆쪽 벽면에는 붉은색 래커로 '주거지에 관광지가 웬말이냐, 주민들도 편히 쉬고 싶다'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량씨는 결국 이 벽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그는 "(벽면에 쓰인 글씨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이 해바라기 계단에서 약 140m 떨어진 또 다른 명물 '잉어계단'도 회색 페인트로 덧칠돼 잉어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화마을의 대표 벽화 해바라기 계단이 사라진 건 지난 15일 오후 8시쯤이다. 주민 3명이 20분 동안 61개 계단에 걸쳐 타일을 이어붙여 만든 꽃 그림 위에 회색 페인트를 칠했다. 주민 박모(25)씨는 "이곳에 벽화가 생긴 이후 밤낮 없이 소음과 낙서, 쓰레기 투척에 시달렸다"며 "구청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아 이웃 주민 34가구의 동의를 받아 벽화를 지웠다"고 했다. '잉어계단'은 지난 23일 오후 11시쯤 덧칠이 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누가 벽화를 훼손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박씨 등 페인트칠을 한 주민 3명을 재물 손괴 혐의로 입건해 조사 중이다.

25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 마을을 찾은 한 관광객이 꽃 그림이 사라진 회색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지난 3월 회색 페인트로 덧칠하기 전, 꽃이 그려진 계단에서 시민들이 산책하는 모습. 이곳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 지역 환경 개선을 위해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후 10년간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됐다. 하지만 지난 15일 인근 주민들이 회색 페인트로 덧칠을 하면서 꽃 그림이 사라졌다.
25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 마을을 찾은 한 관광객이 꽃 그림이 사라진 회색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지난 3월 회색 페인트로 덧칠하기 전, 꽃이 그려진 계단에서 시민들이 산책하는 모습. 이곳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 지역 환경 개선을 위해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후 10년간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됐다. 하지만 지난 15일 인근 주민들이 회색 페인트로 덧칠을 하면서 꽃 그림이 사라졌다. /박상훈 기자

종로구청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상인과 주민을 포함해 140여가구가 살고 있다. 이 중 상인을 제외한 순수 주민은 전체 가구의 70% 정도로 추산된다. 이화마을은 서울 대학로에서 동쪽 낙산 방향으로 800m가량 올라간 지점에 있다. 지난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낙후 지역 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이화1주택 재개발지구(1만3889㎡)에 벽화 16점을 그리면서 벽화마을이 됐다. 2010년에는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2012년에는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대표적인 한류 관광 코스로 떠올랐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카페와 상점 등도 속속 들어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소음 등의 피해도 적잖았다. 작년에는 서울시가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 일대는 당초 재개발 지역으로 고층 아파트 건립이 추진됐지만 사업성이 없어 좌초됐고 올 1월 조합도 해산됐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 11월부터 기존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낙후된 환경을 정비하는 도시재생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민 차인숙(53)씨는 "도시 재생 사업이 진행되면 관광객들이 더 많이 올 텐데, 그러면 앞으로 주민 피해가 더 커질 것"이라며 "주민들이 피해를 감수하는 만큼 주거지역 업종 규제 완화 등 혜택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업종 규제를 해제하면 이 지역 고유의 특색이 사라진다"며 "대신 주택 개량이나 주택 옹벽 보수, 공동 정화조 설치 등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화마을 주민 중 상당수는 벽화 훼손은 과했다는 시각을 보였다. 이곳에서 40년째 살았다는 박모(62)씨는 "재개발이 중단돼 아무도 찾지 않고 더럽기까지 했던 동네가 벽화가 그려진 이후 깨끗해졌다"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은 "벽화가 생긴 이후 집값이 2~3배 오르는 등 좋아진 측면도 많다"고 했다. 이태호 경희대 미술학과 교수는 "이 그림은 공공자금이 투입된 문화적 자산"이라며 "이런 작품을 훼손한 것은 문화 파괴 행위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이화마을처럼 벽화가 조성된 지역은 100여곳에 이른다. 오동훈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마을 상점에 주민을 고용하거나 마을 주민이 참여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재생 사업으로 생기는 과실을 주민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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