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현지 시각)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인물은 리야드 주지사 파이살 왕자였다. 이제껏 주요국 정상들이 사우디를 방문할 때 살만 국왕이 직접 맞이하거나, 왕위 계승 1순위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 왕세자가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전날 6개국 걸프협력회의(GCC)에 참석하기 위해 사우디에 도착한 중동 국가 정상들의 모습을 생중계했던 사우디 국영방송도 오바마 대통령 도착 모습은 아예 방송에 내보내지 않았다. AP는 걸프리서치센터 안보전문가 무스타파 알라니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가 오바마를 믿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라고 분석했다.

‘틀어진 우방’ 티가 나네… 사우디 국왕, 오바마 공항영접도 안 나가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왼쪽) 사우디 국왕이 20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에르가궁(宮)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통적 우방이었으나 최근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사우디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 이날 리야드를 찾았다. 미국이 사우디와 적대 관계인 이란과 핵협상을 타결해 화해 물꼬를 트고, 사우디 정부나 왕실이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에 일부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밀 문건 공개를 추진하면서 최근 미국과 사우디 사이가 틀어졌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의 공항 영접에도 국왕 대신 파이살 왕자가 나와 ‘푸대접’ 논란이 일었다. 미 언론들은 ‘모욕당했다’고 표현했다. 주요국 정상의 사우디 방문 시 살만 국왕이나 왕위 계승 1순위인 모하메드 빈 나예프 왕세자가 영접을 하는 관례로 볼 때 이례적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앞선 세 차례 사우디 방문 때는 살만 국왕이 공항에 직접 나왔다.

지난 2005년 아들 부시 대통령은 당시 사우디의 압둘라 왕세자를 텍사스 크로퍼드 농장에 초청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나라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년 이란 핵협상 타결로 미국이 중동 외교에서 가장 무게를 뒀던 사우디 대신 이란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와 시아파 이슬람 국가 이란은 이슬람 세계 종주국을 자처하는 라이벌로, 올 1월 사우디가 시아파 종교 지도자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국교까지 단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건 사우디 입장에선 일종의 '배신'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 저유가로 인해 사우디에 대한 미국의 외교 의존도가 낮아졌고, 이슬람국가(IS) 격퇴와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정세에 대해 미국과 사우디 견해가 큰 차이를 보이는 점도 두 나라 관계가 멀어지게 된 원인이다. 하지만 미 월간지 '애틀랜틱'은 "두 나라 외교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15년 전에 터진 9·11 테러"라고 보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어떤 나라?]

[[키워드 정보] 알카에다는 어떤 조직?]

2001년 9·11테러 직후 사우디가 테러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9·11 유족들은 사우디 왕가 및 정부를 고소하려 했다. 하지만 외국인의 면책특권을 명시한 법 조항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 상원은 최근 본토에서 일어난 테러로 미국인이 사망한 사건의 경우,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가엔 면책특권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 개정을 추진 중이다. 사우디는 강하게 반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사우디는 7500억달러(약 851조원)에 달하는 미 재무부 채권을 비롯해 자국이 보유한 미국 내 자산을 처분하겠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9·11 비밀 문건 공개 움직임도 사우디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9·11 관련 미 상·하원 합동조사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밥 그레이엄 전 상원 정보위원장 등은 "상실감으로 고통받는 유가족과 미국 국민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며, 900쪽짜리 전체 문건 가운데 사우디의 테러 연루 가능성을 시사하는 28쪽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건에는 사우디 정부나 왕실이 알카에다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돈세탁을 돕는 등 테러에 부분적으로 가담한 정황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텔레그래프는 20일 "9·11 비밀 문건 공개 지지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알카에다의 폭탄 제조 담당이었던 가산 알샤르비가 9·11 테러범들과 함께 비행 훈련을 받은 사실을 입증하는 비행학교 수료증이 워싱턴DC 주재 사우디 대사관 우편 봉투 안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비밀 문건 공개를 반대했던 백악관도 최근 기밀 해제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스 뉴스는 "오바마 대통령이 60일 이내에 문건 공개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