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말 소련 붕괴 과정에서 영토 분쟁이 촉발된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 영유권을 놓고 맞서온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지난 3일 22년 휴전을 깨고 교전을 벌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와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지난 6일 각각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으로 날아가 긴급 중재에 나섰다. 러시아가 이렇게 신속히 대응한 것은 구소련권 국가들 간 영토 갈등이 조기에 봉합되지 않을 경우 자국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리어니드 버시드스키는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충돌 이전에도 러시아·조지아 교전(2008년), 크림반도 사태(2014년) 등 러시아와 구소련권 국가 간 분쟁이 잇따른 점을 지적하며 "소련이 다시 해체되고 있다"고 했다. 25년 전 소련 붕괴 당시의 국경·민족·종교 혼란상이 재현되고 있다는 의미다.
◇영토 분쟁에 종교 갈등까지 겹쳐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에 러시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러시아와 아르메니아가 같은 정교회 국가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인구 96%가 무슬림으로, 이웃한 이슬람 강대국 터키·이란과 인종·종교·언어적으로 유대감이 깊다. 터키의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양국 교전 직후 "아제르바이잔 형제들을 응원하며 끝까지 돕겠다"며 분쟁 개입 의지를 내비쳤다. 터키가 작년 11월 시리아 내전에 참전한 러시아 전투기를 터키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격추한 이후로 양국 외교 관계는 얼어붙어 있다. 터키가 이번 분쟁에도 본격 관여하면 정세가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에서 북으로 500여㎞ 떨어진 곳에는 10여년 전까지 이슬람 극단주의 근거지로 악명 높던 체첸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번 분쟁이 종교 갈등으로 번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할 경우 러시아로선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카네기국제평화연구소의 토머스 드 왈 선임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이번 사태가 러시아와 터키의 대리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러시아 접경 지대 곳곳이 '화약고'
2000년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부활'을 꿈꾸며 구소련권 국가들의 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추진 등 친서방 행보에 무력 개입으로 제동을 걸고 있다. 나아가 이 나라들의 친러 성향 자치 지역을 자국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도 한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해 크림반도를 러시아 땅으로 강제 병합했고, 앞서 2008년 조지아와 전쟁을 벌여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친러 성향 자치공화국으로 독립시켰다. 서방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제재 조치 등을 취하고 있다.
구소련권 국가인 몰도바도 영토 분쟁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인구의 78%가 루마니아계인 몰도바는 EU 가입을 적극 추진하는 등 친서방 기조가 뚜렷하다. 하지만 국토 동쪽의 자치지역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친(親)러 성향으로 중앙정부와 반목하고 있으며, 일부 인사는 러시아와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맞서 지난달 몰도바의 수도 키시너우에서는 수천명의 시민이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양측 간 갈등 조짐이 뚜렷하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지난 7일 트란스니스트리아 갈등 해결을 위한 회담을 제안했지만, 각자 입장이 엇갈릴 경우 '제2의 우크라이나'로 번질 수도 있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교수는 "구소련 시절 공산당의 강력한 통치로 잠복했던 민족·영토·종교 갈등이 분출하면서 러시아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