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전·현직 정상 12명을 포함해 200여 개국 1만4153명이 재산 은닉이나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해외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 등을 설립한 것으로 4일 드러났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이날 중미 파나마의 최대 로펌인 '모색 폰세카(Mossack Ponseca)'가 1977~2015년 업무를 맡았던 고객사 21만4488곳의 각종 금융·주식 거래와 재산 변동 등의 내용을 담은 자료 1150만건을 공개했다. 2013년 이후 ICIJ가 공개한 자료 중 최대 규모다. 특히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급 정치인과 친·인척, 친구 등이 다수 포함돼 있어 향후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파장이 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국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 등 195명이 명단에 포함됐다. ICIJ는 "페이퍼 컴퍼니 설립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대부분 의심스러운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푸틴 최측근 2조원… 메시·청룽 등도
이날 공개된 명단 중 현직 정상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시그뮌뒤르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 총리,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대통령 등이었다. 2013년 총리가 된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 총리는 정치권에 입문하기 전 아내와 '윈트리스'라는 해외 기업을 인수하고도 이 사실을 숨긴 것으로 드러났다. 본인 주식은 나중에 아내에게 1달러에 넘겼다. 살만 사우디 국왕은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회사 2곳의 주주인 룩셈부르크 회사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직 정상으로는 비지나 이바니슈빌리 조지아 전 총리, 이야드 알라위 이라크 전 총리, 알리 아부 라게브 요르단 전 총리 등이 포함됐다.
[[키워드 정보] 일명 '유령회사'라 불리는 페이퍼 컴퍼니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은 측근과 친·인척이 명단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푸틴 대통령의 경우, 친구인 세르게이 롤두긴과 측근 아르카디 로텐베르크 등이 거액의 수상한 거래를 반복했다. 이들이 가스프롬 등 국영회사와 '푸틴의 지갑'으로 불리는 로시야 은행, 5~6곳의 페이퍼 컴퍼니 등을 통해 거래한 자금은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를 넘었다.
푸틴 측근들이 돈을 빼돌리는 방법은 상상을 초월했다. 2010년 2월 10일 로시야 은행이 버진아일랜드에 세운 '샌들우드 콘티넨털'은 2억달러(2300억원)를 키프로스에 있는 '호르위치 트레이딩'에 빌려줬다. 샌들우드 콘티넨털은 다음 날 원금과 이자에 대한 권리를 1달러에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오프 파이낸셜'이라는 회사에 넘겼고, 이 회사는 다시 이 재산을 1달러에 롤두긴이 지배하는 '인터내셔널 미디어 오버시즈'에 팔았다. 2억달러의 거금이 추적 불가능한 자금으로 세탁된 것이다.
푸틴 권력의 후원 아래 주식 위장 거래·돈세탁·특혜 대출·자산 헐값 매각 등 갖가지 수단으로 푸틴과 측근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BBC는 보도했다. 특히 첼리스트인 롤두긴은 푸틴이 20대 중반 때부터 사귄 친구로 푸틴에게 첫 아내 류드밀라를 소개하고, 푸틴의 큰딸 마리아의 대부(代父)도 맡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롤두긴의 재산은 1억달러(약 1150억원)에 달한다"며 "하지만 그는 '나는 사업가가 아니다'고 말해 진짜 주인은 따로 있음을 보여줬다"고 했다.
집권 이후 줄곧 고강도 반(反)부패 사정을 펼치고 있는 시진핑 주석은 매형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2개의 회사를 설립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증권 중개업을 했던 아버지 고(故) 이언 캐머런이 역시 자산 도피처에 펀드를 세웠던 것으로 나타났다.
배우와 스포츠 스타 등 세계 유명인도 이름이 올랐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 축구 선수 메시는 아버지 호세 호라시오 메시와 함께 파나마에 '메가스타 엔터프라이즈'라는 페이퍼 컴퍼니를 세웠다. 그는 지난 2013년 스페인 검찰에서 탈세 혐의로 기소된 이후 법률 대리인을 모색 폰세카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출신의 유명 영화배우 청룽(成龍)은 6개 이상의 페이퍼 컴퍼니를 소유하고 있다.
◇각국, 세무조사·사법 처리 나서
모색 폰세카 공동 창립자인 라몬 폰세카는 AFP통신에 "문서 유출은 대단히 중대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자국 인사들이 포함된 각국은 명단에 오른 인사들의 재산과 금융거래 등에 불법적 요소가 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 호주 국세청은 자료에 등장한 호주인 800명에 대해 금융·세무조사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정치적 파장도 예상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푸틴 대통령 대변인은 "(이번 자료 공개 배경엔) 서방 정보기관들이 대선을 앞둔 러시아를 흔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정보 공격'이 숨어 있다"고 비난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귄뢰이그손 총리의 신임을 묻는 투표와 조기 총선 등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