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왜 국민은 軍을 못 믿나… 믿지 못하면 어떻게 銃을 쥐여주는가"

조선일보
입력 2016.03.21 03:00

['천안함 폭침, 어뢰를 찾다'… UDT 현장 지휘관이었던 권영대 대령]

"사고 현장 방문한 MB '내부 폭발 소지가충분히 있잖아요? 아니면 두 동강 나겠나?'"
"'이 답답한 양반아,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라며 나도 모르게 화를 내"

인양되는 천안함 사진
해군 1특전대대장 권영대 중령은 진해(鎭海) 관사에서 뉴스를 보며 쉬고 있었다. TV에서 긴급 속보로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군함 침몰 중' 자막이 나왔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 40분이었다.

"그날 밤 선발대로 폭발물 처리반을 긴급 투입한 뒤 본대를 편성했다. 잠수(潛水) 숙달자와 장비 전문가 위주로 32명을 뽑았다. 대원들 개개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한주호 준위가 명단을 짰다. 다음 날 대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백령도로 이동했다. 그렇게 56일간 사투(死鬪)가 시작됐다."

천안함 수중 작업의 UDT 현장 지휘관이었던 그가 '폭침(爆沈), 어뢰를 찾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당시 메모와 상부 보고서를 토대로 일기(日記)처럼 썼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게 올라왔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해군사관학교 입교 후 군인으로서 30년을 복무하면서 아직까지도 신념처럼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군은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이다. 사실 이러한 평소의 신념이 천안함 폭침 사건 현장에서는 많이 흔들리게 됐다. 왜 국민은 군인을 못 믿는 것인가. 군인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총을 쥐여주고 나라를 안전하게 지킬 것을 바라면서 편히 잠들 수가 있는가.〉

이번 주말이 '천안함 사건' 6주년이 되는 날이다. 군함이 두 동강 나고 장병 46명이 숨지는 실전(實戰) 같은 장면의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다. 인천해역방위사령부에서 권영대(51) 대령을 만났다. 그는 해군 27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이런 책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상부 지시로 한 것인가?

"군(軍)에서는 제한이 많아 소설로 쓰려고도 했다. 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알려줘야 한다는 마음에 이렇게 썼다. 보안성 검토를 여러 번 거쳤지만 내가 쓴 대로 통과됐다."

―군(軍) 홍보를 위한 상부 결정이 아니라 본인 의지였다는 뜻인가?

"그렇다. 사건 당시에는 혼란스러웠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정리돼야 하는데 '천안함 논란'이 계속됐다. 친척과 친구조차 '의심스러운 게 많더라'고 했다. 내가 현장에서 겪었던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부터 원고를 준비했다."

―'천안함 침몰' 긴급 속보를 접했을 때 본인도 '암초 충돌'로 여겼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랬다. 두 동강 났다는 후속 보도를 보고는 '좌초(坐礁)'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암초 충돌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쪽 해역(海域)에는 좌초시킬 만한 암초가 없다. 나는 그전에 천안함과 크기와 형태가 똑같은 '여수함' 함장을 지냈고 백령도 해역에도 다녀봤기 때문이다."

권영대 대령은 “침몰하는 순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다. 에어 포켓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권영대 대령은 “침몰하는 순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다. 에어 포켓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내부 폭발' 가능성도 제기됐는데?

"내부 폭발도 선체를 두 동강 낼 수는 없다. 이는 선박을 타본 경험이 있다면 모두 공감한다. 현장 수중 작업에 들어갔을 때 수중 카메라로 우선 선체를 찍게 했다. 절단면(切斷面) 확인 결과 그을음 흔적이 없고 회수된 물건에도 탄 흔적이 없었다. 내부 폭발이 아닌 게 입증됐던 셈이다."

―사건 나흘째가 된 날, 현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내부 폭발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나오는데?

"대통령은 여러 경로에서 보고를 받고 있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당시 현장 브리핑에서 '함수(艦首·뱃머리) 위치가 잘못됐다'며 지적할 정도였다. 해군총장 이하 지휘부에게 몇 가지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특히 '내부 폭발 소지가 충분히 있잖아요? 아니면 이렇게 두 동강 나겠어요?' 하고 말하자, 모두 답변을 못 했다."

배석한 그가 브리핑을 담당한 제독에게 "아니라고 말씀하십시오"라고 하자 "자네가 말씀드려"라고 했다. 결국 중령인 그가 "내부 폭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했지만 그 뒤 대통령의 질문 방향이 바뀌었다. 마지막에는 '절대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완벽하게 식별하고 과학적으로 증명까지 해야 한다'는 당부를 했다."

잠수 대원들은 최악의 기상, 강한 조류, 차가운 수온과 싸워야 했다. 목욕탕의 냉탕 온도가 16~17도인데, 바다 수온은 3도였다. 구조 작업을 재촉하는 여론의 압력은 새벽과 야간에도 바닷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호흡 조절기가 얼어 공기가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대통령이 현장을 떠난 직후 한주호 준위가 숨졌다. 잠수 수색 작업 이틀째였다. 그날 기상이 안 좋은데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나?

"파도가 많이 쳤지만 잠수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대통령을 모셔야 했던 내가 작업 현장에 없었던 게 아쉬웠다. 그때는 긴급 이송 체계도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다."

한 준위를 건져 올렸을 때 의식과 호흡이 없는 상태였다. 구조 지휘함의 체임버(잠수병 예방을 위한 특수 장비)에는 다른 대원이 들어가 있었다. 한 준위는 미(美) 군함으로 후송돼 심폐 소생술을 받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군의관이 '그만 멈추자'고 했지만 '4시간 만에 호흡이 돌아온 경우도 있으니 30분만 더 하자'고 버텼다.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시신을 싣고 돌아오면서 '이 답답한 양반아!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어'라며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한주호 준위는 어떤 군인이었나?

"내가 한 준위한테 UDT 교육을 받았다. 교육훈련대에 오래 있었기에 지금 중사 이상의 절반은 그에게 교육받았을 것이다. UDT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천안함 사건 발생 당시 그는 전역을 2년 앞두고 있었다. 부대에 남아 지원해달라고 하자, 그는 '현장에 가지 못하면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아 금방 쓰러질 것'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기뻤다. 그가 안 가겠다고 말했다면 아마 데려가려고 설득했을 것이다."

UDT 대원들 사진
―정예 잠수 인력이 대거 투입됐어도 생존자 구조 실적은 없었는데?

"세월호 사고 때도 석 달간 현장에서 UDT 전력을 통제했다. 그때도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잠수 인력이 대거 집결하지만, 정조(停潮) 시간이나 연결된 잠수 줄 등의 제약으로 실제 들어갈 수 있는 잠수사는 2명에서 최대 6명이다. 이런 잠수 여건을 모르기 때문에 온갖 의혹과 음모가 난무했다."

―세월호 사고 때도 그랬지만, '에어 포켓'에 대한 기대는 현실에서 깨졌는데?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생존 확률이 거의 없다. 에어 포켓으로 며칠간 생존해 있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선내 격실(隔室)에는 각종 전선과 배관이 연결돼 있어 완전 방수가 안 된다. 가족 처지에서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알아도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수색하는 것이다."

사고 7일째, 선미(船尾)에서 시신 한 구(남기훈 상사)가 발견했다. 이는 생존자가 없다는 판단 근거가 됐다. 구조 작업은 중단됐다. 선체가 수면 위로 인양되자 그가 제일 먼저 들어갔다.

"탄약고에서 시신 한 구가 눈에 띄었다. 상의는 벗은 채로 계단을 움켜쥐고 있었다. 차가운 수온 때문에 형태가 유지돼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마나 추웠어? 이제 편히 쉬어야지' 하는 말이 나왔다."

그 뒤 그에게 증거물을 찾는 임무가 주어졌다. 사고 해역(가로세로 457m)의 바닥을 훑는 쌍끌이 어선 운용의 지휘를 맡았다. 작업 닷새째 날, 선원이 "또 발전기 같은 게 올라왔네" 하고 말했다. 어뢰 꼬리(스크루)였다.

"대부분 깨끗했고 일부 나사 부분만 약간 녹슨 상태였다. 윗부분에 찌그러진 얇은 알루미늄 판이 덮여 있었다. 그 속에 '1번' 글자가 있었는데 그때는 못 봤다. 그 뒤 TV로 국방부 기자회견에서 보니 스크루가 오래된 것처럼 심하게 녹슬어 있었다. 바닷속 금속 물질은 공기를 만나면 금방 녹슨다. 즉시 물로 씻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 것 같았다."

―스크루가 나온 뒤에는 바닷속 잔해물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고?

"나는 천주교 신자라 미신을 안 믿는데도, 어선 선장에게 '물속 전우들의 영혼이 지금까지 열심히 그물에 잔해를 넣어줬는데 결정적 증거물을 넣어주고는 이제 쉬러 갔다'고 얘기했다."

―현장 지휘관으로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현장 지휘를 하면서 상부에 실시간 보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국방부, 합참 합동조사단, 해군본부, 해군작전사령부, 탐색구조단 등 보고해야 할 상급 부대가 너무 많았다. 모두 보고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휴대전화 하나로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 뒤 이런 애로 사항을 보고해 해결됐지만."

―언론의 과열 경쟁과 추측성 보도에 대한 지적도 나오는데?

"언론 특성상 특종과 속보에 매달려 부정확하거나 추측에 따른 보도가 많았다. KBS는 단독 보도라며 '한 준위가 수색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졌다'고 오보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군이 뭔가 감추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숱한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데 은폐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사병들이 전역한 뒤 가만히 입 다물고 있겠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천안함 희생 장병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군(軍)의 존재 이유는 싸워서 이기는 데 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우리 군으로서는 치욕적이지 않은가?

"맞다. 함정을 타면 잠수함을 찾는 대잠(對潛) 훈련을 수없이 한다. 천안함 함장은 정말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의 후배였다. 원칙에 맞게 했을 것이다. 그때 기상 상황이 안 좋았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 어뢰 공격을 해온다는 것도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사건 발생 뒤 우리는 바닷속 선체를 인양했고 끝까지 증거물을 찾아냈다. 비록 당했으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낸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의 책에는 '하루 이상 아무것도 식사를 못 했다' '5일째 침대 근처를 가본 적 없고 신발을 벗어본 적 없다' '군인은 국가가 주는 임무는 불평하지 않고 수행해야 하는 게 철칙이다' 같은 구절도 나온다. 그의 아들은 해군 부사관으로 세종대왕함을 타고 있다.

[키워드 정보]
천안함 침몰 사건이란 무엇인가?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