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소설을 쓰는 이유, 절망으로 희망을 말하기 위해

조선일보
  •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6.03.19 03:00

[그 작품 그 도시] '소설가의 일' - 일산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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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의 일산호수공원. 일산에는 작가 작업실이 유독 많다. 소설가 김연수는 에세이집 ‘소설가의 일’에서 소설가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놓는다. 소설가의 ‘일’에는 소설 쓰기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도둑맞는 것과 같은 소소한 사건도 포함돼 있다./플리커
요즘처럼 소설과 소설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소설이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여름, 서울 메트로를 취재하려고 하루 내내 지하철을 타던 그 여름, 나는 지하철 전량에 책 읽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풍경을 본 후 이렇게 기록했다. "2015년 8월 12일 오후 3시 43분 지하철 3호선 삼송역. 이 열차 안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글자로 쓰인 그 모든 것, 서점에서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책을 내는 일, 정확히 말해 문학. 그것이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책이 좋아서 서점에서 책 파는 직업을 선택했을 정도다. 나는 결국 책을 쓰고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일이 세상과 점점 멀어지는 풍경을 내다보는 일은 예상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작업실 앞 호수공원을 매일 걷는다. 추우면 몇 겹씩 옷을 껴입고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몸이 아프면 더 아프지 않으려고 이 행위를 매일 반복한다. 이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멸의 역작을 쓰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쓰고 매일 읽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말이다. 타르콥스키가 그의 영화 '희생'에서 말한 것도 그런 것이다. 화장실 변기 안에 물 한 컵을 붓는 사소한 행위조차 매일 하는 것에는 신성함이 깃든다. 성공에 대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컵스가 했다. '쇼를 계속할 수 있는 것!'

호수공원을 걸었다. 이곳을 걷고 있을 다른 소설가를 생각했다(일산에는 작가의 작업실이 유독 많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잘 가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거나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다고 상상했다. 매일 공원을 걷는데도 몇 년 동안 소설가를 단 한 명 보지 못한 것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봄, 꽃구경을 온 후배와 공원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소설가 김연수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기자 수첩 같은 걸 들고 볼펜으로 뭔가를 메모하며 걷고 있었다. 와락 반가워져 "선배!" 하고 크게 소리친 내가 무색할 정도로, 그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허허. 지금 너 때문에 대작으로 완성됐을지도 모를 영감이 우수수 달아나 버렸다."

나는 언제나 그의 썰렁한 농담을 좋아했기 때문에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뒤돌아서자마자 진심으로, 진심으로 작가에게 미안해졌다. 그는 진지하게 뭔가 메모 중이었고,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늦은 밤 작업실에서 나와 11시면 불이 꺼지는 어두운 공원 안을 하염없이 돈 적이 얼마나 많았나. 이유는 하나, 도무지 소설이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소설을 낸 후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다시 읽었다. 밑줄을 워낙 많이 그어서 여백이 거의 없는 책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기. 바로 소설가의 주된 일이다. 소설쓰기라는 동사가 있다면 그런 뜻이어야만 한다. 누군가 '소설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먼저 글을 썼고, 지금은 그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쓰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어야 한다"는 문장에 '다시' 한 번 밑줄을 그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쓴 소설 '세계의 끝, 여자 친구'에서 가장 좋았던 건 소설 자체가 아니라 실은 작가의 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작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은가. 희망으로 희망을 말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해진 시대를 살면서, 나는 이제 절망으로 희망을 말하는 법에 대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내가 쓴 소설이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 독자들에게 이번 책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보는 법'에 대한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본다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설에는 응답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종종 등장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들이 겪는 생고생이 펼쳐진다. 그건 삶의 다양한 아이러니를 설명하는 소설적 장치인 셈이다. 소설가인 나는 요즘 소설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자주 묻게 된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발설하고 우리의 오해가 이해에 미치지 못했던 순간을 말할 수 있을 때라야 소설은 시작될 수 있다. 사랑에 빛과 그림자가 있다면, 소설을 읽는 행위는 그림자 쪽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한 번도 경험하거나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소설 속에서 체험하며 미리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결국 소설은 '생각의 방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좋은 소설은 '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질문을 남긴다. 의미는 작가가 만드는 게 아니다. 소설의 의미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소설적 지혜라 부르는 체험을 꼭 독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쓰면서 작가에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일은 애초에 자신이 모르던 일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의 일―김연수의 에세이
가령 내가 쓴 어떤 소설 속에서 짝사랑하는 남자 집에 잠입한 여자가 결국 그 집에서 하는 일은, 그 남자가 아닌,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아내를 위해 스웨터를 짜는 일이었다. 여자는 남편의 불륜을 알고 있는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 짜다 만 스웨터를 바라보다가, 스웨터의 실을 모두 풀어 여자를 위한 스웨터로 다시 짜기 시작한다. 한 남자에 대한 짝사랑이 그 남자에게 응답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형질 변환된 것이다. 과연 '애인의 애인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가!'라는 작가의 이상한 질문에 소설 속 주인공이 대답한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작가인 내게 스스로 응답하는 순간의 기적, 매일 하는 일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이토록 소설을 읽지 않는 시대에 내가 소설 쓰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가의 일―김연수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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