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가 돌아왔다. 17일(현지 시각)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1) 전 대통령이 지우마 호세프(69) 현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수석장관으로 취임했다. 2010년 말 대통령 퇴임 후 5년여 만에 중앙 정치 무대에 공식 복귀한 것이다. 원래 룰라 전 대통령의 수석장관 취임식은 오는 22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앞당겨졌다. 한편 브라질 법원은 취임식 직후 룰라의 장관 임명에 대한 효력 정지를 명령했다. 이날 부패 혐의 수사를 받고 있는 룰라를 보호하기 위해 장관을 시켜려 한다는 세간의 의혹을 입증할 만한 호세프-룰라 간 통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야당과 시위대 수만명의 저항에 부딪혔다.
◇'방탄 장관' 제의 녹음 공개돼
브라질 세간에는 룰라가 자신이 키운 호세프 내각의 장관이 되는 '굴욕'을 감수하려는 것에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 부패 의혹에 연루돼 구속 위기에 처한 룰라로선 연방 검찰의 수사와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주관하는 재판 이외에는 면책되는 '방탄 장관' 자리가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날 페트로브라스 부패 수사를 지휘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부 파라나주 연방법원의 세르지우 모루 판사가 공개한 감청 자료에는 호세프 대통령이 룰라에게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서류(장관 임명장)를 보내겠다"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이 녹음 파일에 격분한 브라질사회민주당(PSDB) 등 야당 의원들은 의회에서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항하고, 수도 브라질리아, 최대도시 상파울루 등에서 수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호세프 하야, 룰라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후 성명에서 "호세프 대통령은 룰라 수석장관이 서명식에 참석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해 임명장을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여론은 진정되지 않았다. 룰라는 수석장관에 취임하면 그동안 연립정권 참여 정당과 재계로부터 비판받아온 부처의 장관을 교체하고 성장 우선 경제정책으로 전환하는 등 국면 전환을 꾀할 예정이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동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
◇'상왕' 룰라, '식물 대통령' 호세프
호세프 대통령은 16일 기자회견에서 "룰라가 우리 정부에 들어옴으로써 정부는 매우 강해질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지만 룰라를 끌어들인 것은 사실 도박에 가깝다. 그가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탄핵 공세를 막아낼 정치 수완을 갖췄다 하더라도 이미 예전의 룰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80%까지 치솟았던 룰라의 지지율은 최근 22%까지 떨어졌고, 페트로브라스 부패 수사를 이끄는 모루 판사의 '모래시계 검사' 같은 이미지와 대비되면서 국민적 반감이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수석장관은 브라질 정부조직법상 행정부처를 총괄하며 정부 부처 간 정책 조율과 정부·의회 관계를 중재하는, 사실상 총리에 버금가는 직위다. 룰라가 '상왕'으로 군림하고 호세프 대통령은 '껍데기'가 되면서 정국이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지 정치 컨설팅업체 아르코의 디아고 드 아라가우 연구원은 "호세프 대통령이 룰라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AP통신에 말했고, 한 정당 관계자는 "룰라의 사실상 세 번째 임기가 시작된 것이며 호세프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룰라는 연립정권의 파트너이면서도 연립정권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는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을 잡아야 하는 게 급선무다. 브라질민주운동당 소속인 미셰우 테메르 부통령과 연방상원·하원 의장 등은 룰라의 복귀를 당장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룰라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심해질 경우 언제라도 등을 돌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