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영혼 없는 直譯'과 '아몰랑 意譯', 모두 뛰어넘겠다"

입력 2016.03.16 03:00 | 수정 2016.03.16 07:47

[번역가 노승영]

영문학·뇌과학·컴퓨터학 등 공부, '직관펌프' '늙는다…'등 50권 옮겨
하루에 45장씩 두달에 1권 펴내 "유려하고 정확하며 빠른 게 목표"

어수웅 기자 사진
어수웅 기자
일산 번화가의 소음과 격리된 고봉산 옆 중산마을. 아파트 상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현판이 2층 마지막 점포에 붙어 있다. 동문재(東文齋). 스스로를 '생계형 번역가'로 겸양하지만, 출판계는 '르네상스 번역가'로 편애하는 노승영(43)의 소박한 작업실이다.

작가의 이름도 갈수록 낯설어지는 세상, 번역가의 이름이 친숙할 리 없다. 우선 최근 1년 그의 이름이 등장한 8권의 리스트부터.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조너선 실버타운·서해문집), '소셜미디어 2000'(톰 스탠디지·열린책들),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사월의 책), '테러리스트의 아들'(잭 이브라힘, 제프 자일스·문학동네), '왜 인간의 조상이 침팬지인가'(제레드 다이아몬드·문학사상), '여자로 태어나길 잘했어'(재클린 셔넌·에쎄),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대니얼 데닛·동아시아), '새의 감각'(팀 버캐드·에이도스)'. 2014년에는 무려 13권이었다. 2007년 '프로 번역가'로 입문한 뒤 9년 동안 50권의 속도다.

한국어의 유려함과 정확함 그리고 두 달에 한 권이라는 스피드도 놀랍지만, 사실 '르네상스인'으로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종횡무진의 번역 스펙트럼. 시(詩)에서 진화생물학을 거쳐 인공지능(AI)까지, 문학·철학·과학을 능란하게 가로지른다. 장르의 경계를 이처럼 무화(無化)시키는 번역가는 찾기 어렵다.

번역가 노승영은 의자를 빼고 서서 작업한다. 하루에 200자 원고지 45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실한 노동자. 기계적인 ‘영혼 없는 직역’ 과 자의적인 ‘아몰랑 의역’ 사이에서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이 그의 목표다.
번역가 노승영은 의자를 빼고 서서 작업한다. 하루에 200자 원고지 45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실한 노동자. 기계적인 ‘영혼 없는 직역’ 과 자의적인 ‘아몰랑 의역’ 사이에서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이 그의 목표다. /김연정 객원기자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터프츠대 대니얼 데닛 교수의 '직관펌프…'. '지구 최강의 지식인'이라는 별명답게 데닛은 사람의 두뇌와 마음의 신비를 주제로 문학·철학·인공지능·분자생물학·컴퓨터과학을 거침없이 넘나든다. 많은 이가 번역에 도전했다가 포기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당시 번역을 마친 뒤 노승영은 유머와 자부(自負)를 담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저 혼자만 읽고 똑똑해지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그 문장을 '추궁'하자, "사실은 번역 불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책"이라며 "고통과 보람은 정비례하는 것 같다"고 겸연쩍어했다.

지금의 고통과 보람은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고통과 보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서울대 영문과 졸업,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 수료. "대학원에서 언어학, 철학, 심리학, 컴퓨터과학, 뇌과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과학 번역은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지식의 저주'라는 비유로 전업 번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공자들은 자신들끼리는 다 알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대중 눈높이에 맞지 않는 용어를 쓰기 십상이라는 것. 그는 "쉽게 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건 '속도'다. 해당 분야 교수 등 전공자들은 우선순위에 밀리다 보니, 번역 기간이 1~2년으로 길어지기 일쑤라는 것. 그는 "번역가는 실력이 아니라 속력에 따라 보상받는다"고 믿는다. "하루에 200자 원고지 45장, 주5일 근무로 한 달 900장을 꼬박꼬박 쓴다"는 성실한 직업관이다.

번역가 노승영이 꼽은 성취감 컸던 번역서 5 사진

마침 15일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5번기가 모두 끝난 날이었다. 판사와 의사도 두려워한다는 인공지능. 인간 번역가가 '알파고 번역가'에 대처하는 자세는 무엇일까.

그는 "통념과 반대로 인공지능은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쉽게 해내고, 우리가 쉽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어려워한다"고 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계산은 식은 죽 먹기지만, 다섯 살짜리 아이와 대화 나누기는 컴퓨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구글 번역기'가 뒤죽박죽의 문장을 내놓는 이유다.

그는 4년 전 한 논쟁에서 '영혼 없는 번역'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기계적인 일대일 직역(直譯)에 대한 비판. 구글 번역이야말로 '영혼 없는 번역'이라는 것이다. 제품 사용설명서처럼 해석 다툼의 여지가 없는 번역은 기계가 대체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는 "물론 경기에서 지더라도 아름다운 바둑을 두고 싶어하는 인공지능이 탄생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번역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정신노동도 이미 인공지능이 장악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올 때까지, 이 프로 번역가는 '번역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하루에 45장씩, 영혼을 담아.

 

[이하 이세돌·알파고 바둑을 본 뒤 추가 일문일답]


-알파고는 이렇게 강력한데 구글 번역기는 왜 이리 엉망진창입니까.


"통념과 반대로 인공지능은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쉽게 해내고 우리가 쉽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어려워합니다. 엄청나게 복잡한 계산, 무지막지하게 용량이 큰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 등은 인간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에게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지만 물건을 보고 무엇인지 알아맞히기, 다섯 살짜리 아이와 대화 나누기처럼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일은 컴퓨터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잘하는 분야는 규칙과 경우의 수가 유한한 문제들입니다. 자연어는 규칙의 예외가 많고 애매하기 때문에, 구글 번역이 그나마 지금 같은 결과를 내놓는 것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장의 의미가 명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실 그 문장이 수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Time flies like an arrow."라는 문장은 다섯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중 한 가지 의미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알파고가 프로 기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를 읽듯 구글 번역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죠."


-인공지능 번역기도 알파고처럼 능란해질 가능성이 있는지.


"인공지능 번역의 가능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분야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번역할 글이 특정 분야에 속한다면 한 문장을 여러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줄어듭니다. 내용 전달 위주라면 더욱 수월할 테고요. 이를테면 제품 사용 설명서 같은 글부터 점차 기계 번역의 몫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빅데이터를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촘스키는 빈약한 재료(아이가 말을 떼기까지 듣는 모든 말)만 가지고 언어 습득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를 습득하는 장치가 유전적으로 인간에게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부분 언어 규칙을 기반으로 번역기를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구글은 규칙이 아니라 기존의 방대한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 능력을 향상시킵니다. 언어는 바둑과 달라서, 알파고에게 기존의 모든 언어 자료를 주더라도 뚝딱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번역가가 탄생하지는 않겠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 시작하여 점차 기계 번역의 범위가 넓어질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알파고는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바둑을 흉내 낼 뿐입니다. 구글 번역도 원문을 이해하여 자신의 언어로 번역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어 사전과 배열 규칙을 가지고 번역을 흉내 낼 뿐입니다. 하지만 이세돌이 알파고를 어엿한 대국 상대로 간주하고 '그'의 의도와 전략을 추측하듯 독자인 우리도 구글 번역을 정상적인 번역 결과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니얼 데닛 말마따나 상대방에 대해 '지향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죠. 섣부른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이 하는 일들도 일종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알파고 번역가'에 대처하는 노승영의 자세랄까요(웃음).


" 알파고 번역가'는 이른 시일 안에 반드시 등장하리라 생각합니다(지금도 웹사이트 번역 등에서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기술 번역을 시작으로 많은 번역가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제가 (사이비) 번역 논쟁 이야기를 하면서 엉터리 직역을 '영혼 없는 번역'으로 표현했는데 구글 번역이야말로 말 그대로 '영혼 없는 번역'입니다. 그 말은 영혼 없는 번역가들이 기계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번역이 기계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기에서 지더라도 아름다운 바둑을 두고 싶어하는 인공지능이 탄생한다면, 그 인공지능은 어떤 인간보다 훌륭한 번역을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번역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정신 노동도 이미 인공지능이 장악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꼽은 번역서 5권과 한 줄 이유. 가장 성취감 컸던 책을 중심으로.


1.마오쩌둥, 『실천론·모순론』(프레시안북, 2009)
영어 원고를 받았지만 중국어 원본으로 작업한 책. 중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

2. 재커리 캐닌, 『숏북』(양문, 2010)
처음으로 내가 직접 발굴한 책. 키차별에 공감하며 저자와 함께 분노했다.

3. 멜러니 선스트럼, 『통증 연대기』(에이도스, 201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 책. 이런 식으로 책을 쓰고 싶다.

4. 피터 싱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시대의창, 2014)
높임말 구어체에 설득의 힘이 있음을 실감한 책. 한국어 종결어미의 한계가 아쉽다.

5.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동아시아, 2015)
내게 번역 불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책. 고통과 보람은 정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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