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은퇴하면서 복사판 후배 앉혀… 창의적 연구 막는 굴레"

입력 2016.03.09 03:00 | 수정 2016.03.09 08:59

[세계적 석학들이 평가한 서울대 자연대의 문제점]
"당장 개혁 안하면 세계일류 도약은커녕 지금 위상도 유지 어렵다"

- 종신보장 전에는 실적 집착
논문 인용수 등으로 성과 평가, 실적 채우느라 모험적 연구 못해

- 종신보장 후에는 공부 안해
정년 보장받으면 성과 확 떨어져 수업 주제 10년간 안 바뀌기도

- 신진 교수 유입은 정체
통계학과 13명 중 40대는 2명… 생명과학부에도 조교수 12%뿐

서울대 자연과학대(자연대)가 노벨상·필즈상 수상자 등 자연과학 분야의 해외 석학 12명에게 연구 경쟁력에 대한 진단을 자청한 것은 연구 역량과 성과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다. 서울대 자연대는 그간 국내 최고 수준의 교수진과 학생들을 바탕으로 국내 기초과학을 이끌어왔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12명의 석학은 11개월에 걸쳐 서울대 자연대의 연구 실태와 환경을 진단·평가하고 최근 서울대에 최종보고서를 제출했다. 석학들은 경직된 교수 채용 시스템, 모험적 연구보다는 단기(短期) 성과에 치중하는 연구 풍토 등을 서울대 자연대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김성근 서울대 자연대 학장은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세계 일류로 발돋움하기는커녕 지금의 위상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교수들이 당혹해하고 있다"며 "서울대만이 아닌 한국 기초과학계 전체가 맞닥뜨린 문제란 점에서 개혁이 시급하다"고 했다. 서울대 자연대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대책 마련에 나서기로 했다.

◇"교수 은퇴한 자리엔 복사판 교수 앉혀"

이번 평가에서 총괄 역할을 맡은 팀 헌트 전(前) 영국 암연구소 수석연구위원(200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은 서울대 자연대의 경직된 교수 채용 풍토를 연구 경쟁력을 갉아먹는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원로 교수가 정년퇴직하면서 자기 전공 분야를 연구한 후배를 그 자리에 앉히는 '톱다운(top-down)'식 교수 채용 관행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서울대 교수들 사이에선 자기가 연구한 분야가 (은퇴 후에도)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며 "은퇴자와 거의 흡사한 복사판(copy) 교수를 채용하는 동종교배(同種交配) 풍토를 바꾸지 않으면 세계를 놀라게 할 연구 결과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헌트 전 수석연구위원은 또 "자연대 산하 5개 학부와 3개 학과가 각자 쿼터(할당)를 갖고 교수를 채용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했다. 그는 "하버드대 등 세계적 대학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재능이나 잠재성을 평가해 교수를 채용한다"고 했다.

또 평가단에 참여한 석학 12명은 "단기적이고 정량적인 교수 평가 방식은 결국 학문의 발전과 다양성을 해친다"고 입을 모았다. 톰 루벤스키 미 펜실베이니아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논문 인용 수가 많아야 하고,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모험적인 연구 대신 이미 많은 사람이 연구하는 분야를 선택하게 된다"며 "이렇게 신진 교수가 기존 교수의 연구를 답습하다 보면 고만고만한 '미투(me-too·추종)' 과학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종신 보장받으면 연구 성과 떨어져

뤄칭화 대만 국가실험연구원장은 "정년 보장을 받고 나서 서울대 교수들은 최소한의 수업 시간만 채우면 교수직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이 와이스 미 스크립스 해양과학연구소 명예교수는 "미국 대학 교수 대부분은 3~5년에 한 번씩 성과 검토(review)를 받는다"며 "하지만 서울대 젊은 교수들은 정년 보장을 받기 전에는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하다가 종신직이 되면 연구 성과가 확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평가단은 "수업 주제가 지난 10여년간 바뀐 게 없는 교수도 적잖다"고 했다.

반면 신진 교수들의 유입은 정체돼 있다는 게 평가단의 지적이다. 판젠칭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자연대 통계학과 교수 13명 중 40대는 부교수·조교수 각각 1명밖에 없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50대 이상"이라며 "이렇게 젊은 교수진이 적으면 교수 간에 자극을 얻거나 신선한 연구 주제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자연대 생명과학부도 전체 51명의 교수 중 조교수는 6명(11.8%)에 불과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연과학이 발전하는데 신진 교수 영입이 이처럼 더뎌서는 지금의 위상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평가단의 진단이다.

한국 기초과학계 전체가 자문(自問)해야

팀 헌트 전 수석연구위원은 "한국 최고의 학자와 학생을 끌어들이고도 왜 세계 일류대학으로 발돋움하지 못하는지 서울대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석학들이 지적한 서울대 자연대의 위기는 한국 기초과학계가 안고 있는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기초과학자에게 즉각적인 성과와 응용성을 요구하는 현재의 풍토에선 한국 기초과학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한국 기초과학계 전체가 말만 할 게 아니라 진짜 변화와 혁신에 나서고, 실패를 연구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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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들이 평가한 서울대학교 자연대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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