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비트밸리' 창업 러시… 日 경제 새 심장이 뛴다

입력 2016.03.02 03:07 | 수정 2016.03.02 07:42

[日'실리콘 밸리' 부활]

- 부동산 재개발… 기업들 유턴
넓고 저렴한 사무실 찾아 떠났던 벤처 기업들 시부야로 돌아와
라인 등 日대표 IT기업도 둥지

- 아베 정부, 적극적 벤처 지원
최대 200만엔 창업 보조금
대기업 자금 투자·인력 협업도 벤처 창업 러시에 한몫

도쿄=최인준 특파원
도쿄=최인준 특파원
1일 오전 7시 일본 도쿄의 시부야(涉谷)역. 10개 지하철 노선에선 20~30대 회사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시부야의 랜드마크인 스크램블 교차로(대각선 횡단보도)를 뒤덮은 직장인 중엔 구두와 정장이 아닌 운동화와 청바지 차림에 큰 백팩을 둘러멘 사람들이 많았다. 시부야역 주변에 입주한 IT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루 유동인구 300만명에 달하는 시부야는 최근 IT 기업이 늘어나면서 '쇼핑의 거리'에서 일본의 IT 중심지로 바뀌고 있다. 시부야의 IT 기업 사무실에선 40대 직원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젊은 IT군단'으로 가득했다. 노타이 차림의 회사원, 각종 아이디어를 낙서하듯 적어놓은 게시판 등 마치 대학교 강의실을 보는 듯했다. 금융기업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웹사이트 개발 업체인 제노바로 옮긴 오다 겐이치(34)씨는 "시부야의 벤처기업들은 경직된 일본 대기업 조직과 달리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진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다시 북적이는 시부야 '비트밸리(Bit-Valley)'

시부야의 IT 기업 단지는 1999년 넷이어그룹 등 일본 벤처 1세대의 주도로 '일본판 실리콘밸리'를 표방하며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선 실리콘밸리를 본떠 시부야 일대를 '비트밸리(Bit-Valley)'라고 불렀다. '떫다(시부·涉)'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bitter'와 '계곡(야·谷)'을 뜻하는 단어 'valley(밸리)'를 합성해 만든 단어다. 비트는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트밸리는 2000년대 초반 IT 붐을 타고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쇼핑몰이 많은 시부야에는 몰려드는 IT 기업을 수용할 만큼 사무실 공간이 넉넉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일부 벤처기업은 더 넓고 저렴한 사무실을 찾아 인근의 롯폰기로 옮겼다. 구글·아마존재팬 등 해외 IT 기업들도 이때 시부야를 떠났다. 이후 2000년대 중반 IT 버블이 꺼지고, 2007년 일본 대표 IT 기업 라이브도어의 분식회계가 터지면서 비트밸리를 포함한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시부야역 주변 전경.
일본 내 IT 벤처 창업이 다시 살아나면서 2000년대 초 미국 실리콘밸리를 본떠‘비트밸리(Bit-Valley)’로 불렸던 도쿄 시부야(涉谷)가‘쇼핑 중심지’에서‘IT 중심지’로 바뀌고 있다. 사진은 시부야역 주변 전경. /시부야엑셀호텔도큐 제공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시부야의 '비트밸리'가 3~4년 전부터 활기를 되찾고 있다. 시부야구(區)에는 현재 일본 전역에서 가장 많은 IT 기업(307개)이 밀집해 있다. 신주쿠(71개), 긴자·유라쿠초(54개), 롯폰기(52개) 등 도쿄 내 다른 기업체 밀집 지역보다 많은 규모다. 최근 IT 기업이 다시 '비트밸리'로 유턴하면서 시부야의 공실률은 2011년 평균 8~9%에서 2015년 2~3%대까지 떨어졌다. 도쿄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

일본 벤처투자사인 스카이랜드 벤처스의 기노시타 요시히코 대표는 "게이오대, 와세다대 등 일본 명문대가 가깝고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기 좋은 위치라는 점 때문에 시부야의 비트밸리에 벤처기업이 많이 몰리고 있다"면서 "비트밸리가 되살아나면서 기발한 사업 아이디어가 많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비트밸리는 민·관 합작품

꺼져가던 비트밸리의 불꽃이 살아나기 시작한 건 부동산 재개발이 계기가 됐다. 시부야역 운영사인 도큐전철은 2010년 시부야 지역 재개발 사업에 나섰다. 2012년 완공된 34층 규모의 히카리에 빌딩에 DeNA(소셜게임업체), LINE(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등 일본을 대표하는 IT 기업 본사가 들어오면서 다른 IT 기업들도 속속 시부야를 찾기 시작했다. 도큐전철은 2027년까지 시부야역을 둘러싸고 히카리에 빌딩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을 3개 더 세우고, 그곳에 쇼핑몰과 함께 IT 기업을 유치할 계획이다.

시부야 비트 밸리
일본 소셜네트워킹서비스 기업 믹시(Mixi) 대표를 지냈던 아사쿠라 유스케 스탠퍼드대 객원 연구원은 "초창기 비트밸리는 기업의 수요를 예측하지 못하고 넉넉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던 반면, 지금 시부야에 신흥 기업들이 모이기 시작한 건 입지가 좋으면서 여러 혜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비트밸리가 미국 실리콘밸리와 다른 점은 일본 사회 전체가 달려들어 창업 지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취임 초기 "일본을 미국처럼 벤처 정신이 넘치는 창업 대국으로 만들겠다"며 창업 지원 의지를 피력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14년 "미래 먹거리는 벤처 창업에 달려 있다"며 '일본재흥전략 2014'라는 구조 개혁 프로그램을 내놓고 벤처기업 활성화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그해 벤처기업 447개와 대기업 97개를 매칭하는 콘퍼런스를 열어 투자를 유도했다. 이와 함께 창업 비용으로 최대 200만엔(약 2200만원)까지 보조금을 지원하고,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세제 혜택을 주는 '기업 응원 세제'를 도입해 창업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대기업의 활발한 투자도 최근 시부야 지역의 '창업 러시'를 이끌고 있다. 일본 주차업계 선두주자인 파크24는 투자 전문회사 타임스 이노베이션 캐피털을 설립하고 지난해 30억엔(약 328억원)을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대형 금융 기업인 미쓰비시UFJ캐피털은 올해 35억엔(약 383억원)을 스타트업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시장조사기관 재팬벤처리서치(JVR)에 따르면 일본 내 비상장 벤처기업이 유치한 투자금은 2014년 1154억엔(약 1조2600억원)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처음으로 1000억엔을 돌파했다. 지난해에는 1400억엔(약 1조5300억원)을 넘어섰다. 일본 주간지 동양경제는 "최근엔 대기업이 벤처기업에 인력을 파견하는 협업도 이뤄지고 있다"며 "미국에 비하면 늦었지만, 일본의 IT 산업도 첨단 기술을 개발하려는 업체들이 생겨나고 대형 금융기관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新성장 엔진 될까

일본은 그동안 탄탄한 제조업으로 세계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모노즈쿠리(物作り·물건 만들기)에 집착한 나머지 세계의 IT 산업 흐름에 뒤처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본 내 전문가들은 최근 '비트밸리 2.0'을 중심으로 새롭게 일고 있는 창업 붐이 일본 경제의 체질을 바꿔줄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쇼핑과 상업의 거리로 유명한 시부야가 이제는 산업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트밸리의 고동(鼓動)'을 쓴 아라이 히사시씨는 "빗토바레(ビットバレ-·비트밸리의 일본식 발음)의 부활은 제조업 강세에만 만족해온 일본 경제를 바꿀 에너지를 지닌 뜨거운 마그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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