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은 끝까지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6.02.25 03:00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 출간
    일부 학자 "贊託 선회" 주장 반박
    "남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해 통일정부 수립 위해 노력… 자유민주주의 터전 위 弱者 배려"

    "조만식은 일부 학자의 주장과 달리 끝까지 신탁통치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김구·송진우 등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강한 유대 속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전반 북한 지역의 민족지도자였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의 광복 후 활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리한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북코리아)가 출간됐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자인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조만식 측근들의 증언과 미군정 문서, 소련 자료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50년 10월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조만식의 행적을 추적했다.

    1945년 9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 집무실의 조만식 선생.
    1945년 9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 집무실의 조만식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박 교수는 조만식이 나중에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조만식이 1947년 7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참석차 평양에 온 미국 측 대표 브라운과의 면담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는 주장에 대해 박 교수는 조만식은 신탁통치보다 임시정부 수립이 우선이며, 더욱이 소련이 참여하는 신탁통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주장한다. 또 조만식이 1947년 5월 하지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밀서에서 이승만의 반탁(反託) 활동이 미소공위 사업을 방해할까 우려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조만식이 우려한 것은 이승만의 반탁이 아니라 미소공위 참가 거부였다고 반박한다. "조만식은 이승만 박사의 행동이 미소공위 사업의 진전을 방해할 것을 우려한다"는 밀서의 내용을 반탁에 대한 우려로 오독(誤讀)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소련과 김일성 일파의 탄압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진 조만식은 미소공위를 재기의 기회로 생각해 반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적극 참여를 시도했고, 미국도 이를 지원했다고 분석한다.

    이 책에 따르면 광복 무렵 북한, 특히 평안도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졌고 그 중심에 조만식이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만식은 3·1운동,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농민·청년운동을 함께했던 동지들과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평남건준은 여운형이 주도한 경성(서울)의 건준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추대하면서 치안 유지에 주력했다. 평안도의 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펼쳤고 광복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8월 18일 평양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식에 참석한 조만식 선생(왼쪽). 가운데는 평양 주둔 일본군 사령관 쇼지 후루카와 중장, 오른쪽은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다.
    8월 18일 평양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식에 참석한 조만식 선생(왼쪽). 가운데는 평양 주둔 일본군 사령관 쇼지 후루카와 중장, 오른쪽은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다.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8월 26일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평남건준을 공산주의자들과 합작시켜 인민정치위원회로 전환시켰다. 이어 9월 초 사실상 북한의 단독정부인 5도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조만식에게 그 위원장을 맡기려 했다. 하지만 통일정부 수립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조만식이 거절하자 11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5도 행정 10국을 구성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조직했고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조선민주당은 정치적 자유를 중시하면서 사적 재산권과 농민·노동자의 노동권을 함께 보장하는 개혁적 경제 정책을 지향했다. 친소(親蘇) 정권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던 소련은 당초 북한 주민에게 절대적 신망을 받는 조만식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의주학생사건과 신탁통치 문제에서 조만식이 소련의 입장을 따르지 않자 그를 '친일파'로 공격했고 1946년 1월 그를 연금했다.

    박 교수는 조만식이 남한 민족주의자 및 미군정과 연결돼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유학과 조선일보 사장 재임을 통해 서울에 강력한 인맥이 있었고, 김동원·장이욱·최능진·한근조·이종현·문봉제·이윤영·박현숙 등 월남한 측근들이 메신저 역할을 했다. 미군정은 조만식을 석방시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다. 조만식은 미군정에 토지개혁 등을 권유했다. 소련군이 들어온 직후 잇따른 월남 권유에 "북한 동포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거절했던 조만식도 연금이 장기화되자 어쩔 수 없이 서울행을 결심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서울로 옮긴 조선민주당과 조만식 측근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했고 이승만도 이들을 배려했다.

    박명수 교수는 "조만식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시민계층이 주도해서 만들려 했고 이런 꿈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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