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할머니의 기른 情

    입력 : 2016.02.24 03:00

    작년 이맘때 친구가 전화했다. 중학교 입학하는 조카에게 뭘 선물하면 좋으냐 물었다. 애틋한 조카라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다는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암으로 세상을 뜬 언니의 딸이라고 했다. 언니가 떠난 뒤 새장가 든 형부는 외가 식구가 딸 만나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새엄마와 친해져야 하는데 이모들 드나들면 아이가 방황한다는 거였다. 손녀를 딸보다 사랑했던 외할머니는 아이가 그리워 날마다 운다고 했다. 형부 눈치에 선물도 택배로 부쳐야 한다며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정반대 사연도 있다. 나이 쉰 넘은 지인이 이혼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뒤늦게 '진짜 사랑' 만나 남편과 헤어졌단다. 늦둥이 아들 양육권은 남편이 가져갔다. 가장 슬퍼한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외손자를 갓난아기 때부터 길러 온 할머니는 딸이 유책(有責) 배우자가 되는 바람에 손자와 헤어질 판이었다. 할머니는 용기를 냈다. 손자를 계속 내가 키워주면 안 되겠냐고. 딸과 헤어진 사위와 외손자, 그리고 할머니는 한 지붕 아래 살게 됐다.

    [만물상] 할머니의 기른 情
    ▶손자·손녀 사랑이 자식 사랑보다 깊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가 보다. 바쁜 자식 대신 손자·손녀 도맡아 키운 할머니·할아버지라면 그 절절한 사랑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손주 키운 공(功)'은 없다고, 아이가 살짝 다치거나 열만 나도 자식들한테 지청구 듣기 일쑤다. 그래도 "손주 키우는 재미로 산다"는 어르신들이다. 일하는 며느리 대신 손자·손녀 업어 키운 시어머니도 아이들 등쌀 피해 여행을 떠났다가도 "내 강아지들 눈에 밟혀" 두 밤도 못 자고 달려오신다.

    ▶엊그제 서울가정법원이 조부모의 절절한 손자 사랑을 인정했다. 사위가 재혼하면서 손자와 떨어지게 된 외할머니가 손자를 만날 수 있는 면접교섭권을 처음 허용했다. 부부가 갈라섰다고 해서 조손(祖孫) 관계도 단칼에 잘라 버리는 것은 인륜에 맞지 않는다는 뜻에서다. 맞벌이 가구가 늘고 아이 키우는 조부모가 많은 요즘 반가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스웨덴 살 때 기이한 풍경을 봤다. 크리스마스에 아는 집 초대받아 갔더니 가족 20여 명이 기다란 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시끌벅적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돈의 팔촌까지 모인 거냐 묻자 집주인이 한 사람씩 소개했다. "이 사람은 전 남편 누나, 저 사람은 지금 남편의 사촌, 건너편 사람은 옛날 시아버지의 동생이고…." 이게 웬 콩가루 집안인가 싶지만, 별별 사연으로 얽힌 인연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둘러앉아 웃으며 밥 먹는 모습은 낯설고도 큰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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