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포퓰리즘의 비극… 생필품難 주민들, 마켓 앞에 1㎞ 줄서

조선일보
  • 김덕한 기자
    입력 2016.02.15 03:00

    [베네수엘라 경제난 현장 - 김덕한 특파원 르포] [上]

    무상의료 자랑했는데… 시중엔 약도, 약 살 돈도 없다

    국영 수퍼마켓 週1회 출입제한… 밤새 줄서도 못사는 물건 많아
    17년새 화폐가치 250분의 1로… 공장과 농장은 생산마저 포기

    김덕한 기자
    김덕한 기자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무상 임대 주택에 사는 줄리나(여·26)씨의 '직업'은 '바착게로'('일개미'라는 뜻)다. 월요일 밤이면 카라카스에 있는 국영 수퍼마켓 두 군데 중 한 곳인 '비센테나리오'에 가서 밤새 줄을 선다. '바착게로' 수십명은 이곳에서 늘 만나는 낯익은 동료다. 이들을 '바착게로'라고 하는 것은 일개미처럼 긴 줄을 서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아침 8시 수퍼 문이 열리자 줄리나씨는 신분증과 지문 확인을 거친 후 매장에 들어갔다. 신분증 끝번호가 3번인 그녀는 매주 화요일 수퍼 입장이 가능하다. 익숙한 솜씨로 옥수수가루, 쌀, 스파게티 국수, 우유, 커피, 비누, 생리대, 휴지, 면도기 매대를 순서대로 돌았지만 구매 제한 개수인 2개씩을 모두 산 품목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작년 11월까지만 해도 밤새 줄을 서면 못 사는 물건이 두세 가지도 안 됐는데, 지금은 없는 물건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줄리나씨는 이렇게 산 물건을 암시장인 메르카도 차카오의 상인에게 넘긴다. 국영 수퍼에서 25볼리바르(Bs·베네수엘라의 화폐 단위)인 쌀(1㎏)은 암시장에서 350Bs, 19Bs인 옥수수가루는 400Bs, 70Bs인 우유는 800Bs에 팔리기 때문에 암시장 상인에게 바로 넘기더라도 서너 배는 받을 수 있다.

    정부 가격과 암시장 가격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베네수엘라는 지금 처참한 생필품난을 겪고 있다. 소비자들은 매장 밖 1㎞까지 물건을 사느라 장사진을 이루고, 폭동을 막기 위해 무장 군인이 매장을 지키는 게 일상사가 됐다.

    1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수퍼마켓 앞에 식료품을 사려는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생필품 사려고 장사진 - 1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수퍼마켓 앞에 식료품을 사려는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극심한 물자 부족 사태로 마트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물건을 사는 게 일상이 됐다. /AFP 연합뉴스
    수출의 95%를 석유에 의존하는 이 나라는 한때 배럴당 120달러가 넘던 원유 가격이 20달러대로 곤두박질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좌파 포퓰리즘 정권의 무능과 부패다. 1999년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후 17년 만에 베네수엘라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총체적으로 망가졌다. 차베스 집권 기간인 1999~2012년 49%였던 빈곤율이 25%까지 떨어지며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지난해 빈곤율이 73%로 급상승해 포퓰리즘의 허상을 증명했다. 살인율, 납치 사건 발생 건수 등 범죄율도 크게 높아져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지난 3일 달러 대비 볼리바르화의 암시장 환율이 1000을 돌파했다. 1달러를 가져가면 베네수엘라의 최고액권 화폐인 100볼리바르를 10장이나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차베스가 정권을 잡았던 1999년 환율이 4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볼리바르화 가치는 17년 만에 250분의 1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지금 베네수엘라 정부의 공식 환율은 6.3대1을 고집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1000볼리바르를 줘야 1달러를 구할 수 있는데, 정부는 6.3볼리바르에 1달러를 주도록 환율 정책을 유지하고 있고, 그 환율에 정부가 공급할 수 있는 달러는 말라버렸으니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베네수엘라 국영방송 ANTV 스포츠뉴스 앵커 루이스 에두아르도 인시아르테가 지난해 11월 19일 생방송 뉴스 진행 도중“오늘을 마지막으로 뉴스 진행에서 물러난다”며 사직을 선언하는 장면.
    국영방송 앵커 "월급 14달러‐ 그만두겠다" - 베네수엘라 국영방송 ANTV 스포츠뉴스 앵커 루이스 에두아르도 인시아르테가 지난해 11월 19일 생방송 뉴스 진행 도중“오늘을 마지막으로 뉴스 진행에서 물러난다”며 사직을 선언하는 장면. 인시아르테는 자신의 월급이 1만1200볼리바르로, 암달러로 환산하면 14달러에 불과하다며 사직 이유를 설명했다. /유튜브 캡처
    베네수엘라에서 30년째 신발·잡화 공장을 운영해온 이탈리아계 베네수엘라인 더글러스(60)씨는 지난해 공장 운영을 포기했다. 그는 "원자재를 수입하려면 암시장 환율대로 달러를 바꿔서 물건을 사와야 하는데 정부는 제품값을 제한하고 있으니 도저히 공장 운영을 할 수 없다"며 "경제도 돌지 않고 물건도 없고 물가는 계속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수출·수입도 마비됐다. 3일 오후 카라카스의 라과이라 부두에는 컨테이너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정부가 지정한 필수 품목 54개 가격을 억지로 통제하는 바람에 이 품목 생산자들은 생산을 포기하는 상황이다. 양계 농장은 사료값보다 싼 계란값 때문에 닭을 폐사시키고 카라카스 시내 정육점도 대부분 휴업해 문을 닫았다.

    국제사회에서는 "베네수엘라의 국가 부도 확률이 99%"라고 우려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시작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무상·저가 임대 주택 제공 등 '그랑미션'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정책은 이미 고장이 났다. 병원엔 약이 없고, 학교엔 교사가 없다. 지난해 전역한 한 예비역 장성은 "병원에서 진단서는 끊어주는데 약국에서 약을 구할 방법이 없다"며 "당신이 만약 아프다면 100달러 정도를 내면 암시장에서 약은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계층은 중산층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달러 예금이나 해외 부동산을 가진 부유층은 달러화 고평가의 혜택을 누리며 달러화 기준으론 엄청나게 싼 물가를 즐기고 있고, 빈곤층은 정부의 가격 통제에 묶인 생필품을 구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쯤의 월급 생활자들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난해 11월 베네수엘라 한 국영방송 앵커가 방송 진행 도중에 1만1200볼리바르인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며 "오늘을 끝으로 방송을 떠나겠다"고 한 장면은 유튜브에서 지금도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 월급 생활자 대부분은 3만~5만볼리바르 정도를 받는데,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 가격이 1400볼리바르다.

    한때 남미 최고 부국(富國)이었던 베네수엘라는 좌파 포퓰리즘 17년 만에 정상적으로는 살기 어려운 나라로 변했다.

    [나라 정보]
    석유 매장량 1위 베네수엘라는 지금?
    [인물 정보]
    우고 차베스 前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누구?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