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정법원 가사23단독 이현경 판사는 일본에 살면서 재일교포 3세 아내(39) 동의 없이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잠적한 한국인 남편(41)에게 "아이들을 일본으로 되돌려보내라"고 결정했다고 14일 밝혔다. 한쪽 배우자가 일방적으로 해외로 빼돌린 자녀를 원래 살던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규정한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에 따라 한국 법원이 처음 내린 결정이다.
2005년 일본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8년 만인 2013년부터 별거해왔다. 열 살과 여덟 살 된 두 아들은 아내가 키웠다. 지난해 7월 남편은 '한국에서 투병 중인 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했으니 며칠간 아이들과 아버지를 만나게 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믿은 아내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겼다. 그러나 남편은 한국에 입국한 뒤 아내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아내는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에 근거해 우리 법원에 소송을 낸 것이다.
재판부는 "남편이 아이들을 불법적으로 데려와 한국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아내의 양육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이 결정이 확정되면 남편은 아이들을 일본에 있는 엄마 앞에 데려다놓아야 한다.
헤이그 국제아동탈취협약은 배우자 한쪽이 해외로 불법 이동시킨 아이를 신속히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1980년 국제사법회의에서 만들었다. 1983년 발효된 이 협약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해 미국·영국·독일·호주 등 93개국이 가입해 있다. 양육권을 누가 가질지는 정식 재판을 통해 결정할 일이지만, 그 결정이 나올 때까지는 일단 아이를 원래 살던 곳에 있게 하라는 취지다. 한쪽 부모가 아이를 해외로 데려가버리면 다시 찾을 방법이 없고,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인 아이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국제결혼 커플의 이혼, 아동 탈취가 함께 늘어나자 2012년 12월 협약에 가입했다.
협약에 가입한 나라끼리는 공조를 통해 아동 탈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국 법원과 법무부는 아동 반환 신청이 들어오면 아이의 소재를 파악하고 반환 결정을 내려 아이를 원래 살던 나라에 돌려보내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외국 당국이 같은 절차를 밟는다. 외국 법원과의 공조를 담당하고 있는 서울가정법원 김성우 판사는 "특히 유럽의 경우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아동 탈취 사건도 연간 수천 건에 달한다"며 "이 중 상당수가 협약에 따라 부당하게 뺏긴 아이를 돌려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부부 간에도 협약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우자와 별거 중인 한쪽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떠나버릴 경우 이 협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 관계자는 "요즘은 국제결혼 커플뿐만 아니라 내국인 부부 사이에서도 아동 탈취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협약을 잘 몰라 아무 소용없는 '이행명령'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요 국제결혼 상대국인 중국·베트남·캄보디아 등이 협약에 가입해 있지 않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2013년 6월 대법원은 남편 몰래 베트남 친정집으로 아이를 빼돌린 여성(29)에게 '엄마가 특별한 불법행위 없이 아이를 데려간 것을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 관계자는 "중국·베트남·캄보디아 등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이 많은 나라들이 협약에 가입하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헤이그 국제아동탈취 협약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가까운 가족이 일방적으로 해외로 데려간 아이를 신속하게 원래 거주하던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전 세계 93개국이 가입한 다자간 협약. 협약의 적용 대상은 16세 미만의 아동이다. 법원은 원칙적으로 반환 신청을 받은 날로부터 6주 이내에 결정을 내리게 돼 있다. 다만 아이를 원래 살던 나라로 돌려보낼 경우 혼란이 커진다는 점 등을 입증하면 신청을 기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