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사건의 재판(再版)인가.
1999년 2월 6일 새벽 4시쯤 전북 완주군 삼례읍 나라수퍼에 3인조 강도가 들이닥쳤다. 범인들은 수퍼 주인 유모(당시 77세) 할머니와 옆방에서 잠자던 조카 부부의 눈과 입을 청테이프로 가린 뒤 금반지와 목걸이, 현금 등을 빼앗아 달아났다. 유 할머니는 30분쯤 뒤 질식사했다. 이 사건은 '나라수퍼 3인조 강도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일주일쯤 뒤 경찰은 삼례에서 나고 자란 임모(당시 20세)·최모(당시 20세)·강모(당시 19세)씨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수사기관 등에서 '삼례 3인조'라고 부른 이들에겐 절도 전과가 있었다. 이들은 수사기관과 재판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1·2심 법원은 "피고인들의 진술이 범죄 사실과 부합하며 범행을 반성하고 있다"며 징역 3~6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복역했다.
그런데 17년이 흐른 뒤인 최근 부산 출신 이모(48)씨가 자신이 사건의 진범(眞犯)이라고 고백하고 나섰다. 이씨는 임씨 등 '삼례 3인조'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부산 출신 3명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이씨는 임씨 등이 지난해 3월 법원에 두 번째로 낸 재심(再審) 청구 사건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에게 과거 일을 털어놓으며, 임씨 등과 유 할머니의 유족 등에게 사과도 했다. 전주지법이 담당하고 있는 재심 청구 사건은 지난해 11월 한 차례 심리가 진행됐다. 만약 재심이 열리고, 재심에서 이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임씨 등을 처벌한 수사기관과 법원은 엉뚱한 사람들을 범인으로 몬 셈이 된다.
이 사건의 진범이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은 사건 초기부터 있었다. 임씨 등이 1심 재판을 받던 1999년 4월 '진범이 따로 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이씨가 말한 대로 '부산 3인조'가 범인이라는 내용이었다. 신고자는 이들이 훔친 귀금속을 직접 팔아줬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고자가 재차 부산지검에 제보해 내사가 진행됐다. 이씨는 그때도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부산지검은 사건을 전주지검으로 넘겼으나, 전주지검은 '말이 오락가락한다'는 이유로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2000년 '삼례 3인조' 가운데 한 명인 최모씨가 법원에 처음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관련자들 말에 신빙성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검찰·법원 등에서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하지만 당시 판결문 등을 보면 '삼례 3인조'가 범행을 자백하고 반성했으며, 이들의 진술과 범행 당시 상황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온다. 또 이들은 항소하면서 무죄를 주장한 게 아니라 '형을 깎아달라'고 했고, 대법원 상고도 3명 중 1명만 한 것으로 돼 있다. 진범으로 나선 이씨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박준영 변호사는 "과거 재판과 재심 청구 등에서 이들이 제대로 된 법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 데다, 수사 과정에서 폭행과 위협을 당해 거짓 자백을 한 정황이 뚜렷하다"고 했다. '삼례 3인조' 중 한 명이었던 강모씨도 "당시 국선변호인에게 '억울하다'고 호소했는데, 국선변호인이 '그러면 형량만 많이 나온다'고 해 혐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건 당시 현장검증을 지켜봤던 유 할머니의 사위 박모씨는 "수사기관이 불쌍한 아이들을 살인범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이씨가 함께 범행을 했다고 한 '부산 3인조' 가운데 한 명은 지난해 지병으로 숨졌고, 다른 한 명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