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허우샤오셴(侯孝賢·69)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건 당대(唐代)를 배경으로 한 무협 영화 '자객 섭은낭'(2월 4일 개봉)이다. '비정성시' '동년왕사' 등 근현대 대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찍어온 그가 근대 이전의 중국을 카메라에 담은 것도, 무협이란 장르를 택한 것도 처음이다. 개봉을 앞두고 방한한 허우 감독을 27일 서울 건국대 근처 한 극장에서 만났다.

1947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난 그는 이듬해 일가가 대만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만 국립 예술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80년대 '펑구이에서 온 소년',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등을 연출하며 대만 뉴웨이브를 이끄는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량차오웨이가 주연한 영화 '비정성시'(1989)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아시아의 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이야기를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대만 사회나 역사를 망원경으로 조망해내는 게 특기다.

영화‘비정성시’로 기억되는 허우샤오셴 감독은 27일“근대 이전의 중국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자객 섭은낭’이 처음”이라며“여느 무협 영화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허우 감독은 이날 "대학 다닐 때 당대의 전기(소설)를 많이 읽었고, 언젠가 꼭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무협 영화와 비슷한 것을 만들기는 싫었다"고 했다. 이 영화도 그가 대학 때 읽은 전기 '섭은낭 고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섭은낭(서기)은 고위 관료의 딸로 태어나, 훗날 지방 절도사가 되는 정계안(장첸)과 정혼을 한다. 하지만 정계안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섭은낭은 부패한 관리를 살해하는 암살자로 키워진다. 사부로부터 정계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은 섭은낭은 옛 정인(情人)에 대한 감정과 자객으로서의 임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무협 영화지만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현란한 칼솜씨를 겨루거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검객들을 '자객 섭은낭'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오랫동안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허우 감독의 전작들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감독상·작품상 등 다섯 개 부문을 차지했다.

"'피웅'하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거, 저는 못하겠어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뭐든지 다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아무런 제한이 없고, 현실성도 없다면 표현의 자유가 없어집니다. 제한이 있어야 그 안에서 가장 많은 걸, 가장 좋은 걸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요."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화제가 될 때마다 그의 작품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허우 감독은 "여전히 대만 역사를 다룬 영화를 찍고 싶지만 그런 민감한 영화에는 투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최근에 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구체적인 대화를 나눠보면 나와 견해가 다르더라. 나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시대와 떨어져서 표현하길 원한다"고 했다.

허우 감독은 금마장과 타이베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8년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8년 동안 영화를 안 찍고 싶었겠나. 영화제 일을 맡으면서 구조부터 다 바꾸느라…. 그게 내 문제다"라고 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자주 찾았던 그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 전(前)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영화인들과 타이거 클럽을 결성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친목 모임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회고전을 연 소감을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늙었단 얘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