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칼 루이스(미국)와 함께 가장 화제가 됐던 육상 선수는 짙은 화장과 네일아트를 하고 나온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미국)였다. 그리피스 조이너는 100m, 200m, 400m계주에서 우승해 3관왕에 올랐다. 그해 7월 대표 선발전에서 100m 세계신기록(10초49)을 세웠던 그는 9월 서울올림픽 200m에서 21초34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은메달을 딴 자메이카의 그레이스 잭슨(21초72)을 0.38초 차로 따돌리는 압도적 승리였다. 그의 100m, 200m 기록은 30여년이 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최근 러시아 육상 선수들의 조직적인 도핑 의혹이 세계 스포츠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불멸의 기록'이 쏟아졌던 1980년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국제 육상계에선 당시의 의심스러운 기록을 모두 무효로 봐야 한다는 '초기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에드 워너 영국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강경파는 도핑 의혹이 짙은 1980~1990년대 선수들의 약물 복용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당시 기록을 모두 삭제하자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서배스천 코 IAAF(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19일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도 "일부 종목의 기록 초기화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었다. 기록경기인 육상의 뿌리를 뒤흔들 수 있는 주장에 대해 IAAF 회장이 수용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그만큼 당시 약물 복용이 심각하다고 공감한 때문으로 해석된다.

육상 전문가들은 특히 1980년대에 주목한다. 서방과 동구권이 체제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놀라운 기록이 집중적으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1980년대 육상 기록은 그리피스 조이너의 기록을 포함해 총 14개로, 이 중 11개가 소련과 동독 등 동구권 선수들이 세운 것이다.

1987년 여자 포환던지기에서 소련의 나탈리야 리소프스카야가 22.63m를 던져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불가리아의 스테프카 코스타디노바가 여자 높이뛰기에서 2m9㎝를 넘었다. 1988년엔 여자 원반던지기의 가브리엘레 라인쉬(동독)와 여자 100m 허들의 요단카 돈코바(불가리아)가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전세계의 육상 선수가 30여년 이 기록에 도전했지만 아직도 철옹성이다. 선수들의 신체 조건이 개선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록이 향상되고 있는 다른 종목에 비하면 이례적인 현상이다.

여자 200m는 미국 매리언 존스가 역대 2위지만 그가 1998년에 세운 기록(21초62)은 1위 그리피스 조이너보다 0.28초나 늦다. 한국 여자 100m 기록(11초49) 보유자인 이영숙 감독(안산시청)은 "0.28초면 거리로 1.5m 정도 뒤진 것"이라며 "단거리에선 상당한 차이"라고 했다.

100m도 마찬가지다. 그리피스 조이너의 1988년 기록(10초49)에 미국의 카멀리타 지터와 매리언 존스가 도전했지만 각각 10초64와 10초65에 그쳤다. 나머지 종목들도 비슷하다.

이에 대해 김복주 대한육상경기연맹 경기력향상위원장은 "1980년대에 나온 일부 기록은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88올림픽을 현장에서 봤던 김 위원장은 "당시 미국과 동구권 남자 육상 선수들의 몸매는 역도 선수 같았고, 여자는 남자 육상 선수 같았다"며 "선수들 사이에선 근육강화제를 쓴다는 얘기가 많았지만 정작 발각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피스 조이너는 1998년 38세의 나이로 급사해 약물 복용 의혹이 제기됐다. 400m 기록 보유자인 동독의 마리타 코흐는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을 담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