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 브리짓 슐트의 책 ‘타임 푸어’는 열심히 사는데도 항상 시간에 쫓긴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을 위한 책이다. 슐트는 사회의 압박이 ‘타임 푸어’를 만든다고 말하며 일·가사·휴식의 균형을 잡는 법을 조언한다.

얼마 전 인천의 한 도서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책에 사인을 받으러 온 한 여고생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작가님. '힘들면 힘내지 마세요'라는 말 여기에 적어주시면 안 돼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강연 중에 그 말을 꽤 여러번 했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말을 적어달라는 아이가 대여섯 명이나 더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이유는 하나. 요즘의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말이 그런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힘내세요! 파이팅! 건필! 아자아자!!!

도대체 얼마만큼 힘을 더 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쥐어짜도 나는 왜 늘 시간에 쫓기며 허둥댈까. 내 시간 관리에 엄청난 구멍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타임 푸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의 부제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는 지난 3년간 내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자문자답하던 주제의 헤드라인처럼 보였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브리짓 슐트는 유명한 시간 관리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다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여가 시간은 어떤 시간이죠?"라는 기습적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아픈 날이요."

솔직히 놀랐다. 나 역시 그랬던 것이다. 최근 나는 친구들에게 '죄책감 없이 쉬는 법'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었다. 스스로에게는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별하고, '자유'와 '여유'를 구별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결과는? 대실패. 나는 여전히 시간 부족에 시달렸다. 원고 쓸 시간, 잠잘 시간, 쉴 시간, 놀 시간, 목적 독서 이외에 순수하게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가장 부족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멍 때리는 시간' 역시 사라진 것이다.

'타임 푸어'의 저자는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던 어느 날 "더는 이렇게 못 살아!" 소리치며 잃어버린 삶과 시간을 되찾기 위해 기나긴 탐구를 시작한다. 시간 연구가를 만나 생활 속 시간의 '틈'을 관찰하고, 뇌 과학자를 만나 우리에게 가해지는 '시간 압박'이 뇌에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밝혀낸 것이다. 그녀는 취재를 통해 '타임 푸어'가 전 세계적인 현상임을 깨닫는다.

"첨단 기술은 쫓기는 삶의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든다.(…)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에 시선을 뺏긴 채 산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한다. 이런 활동은 시간 일지에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시간에 대한 경험은 '작은 조각 수천개'로 찢어진다.(…) 킴벌리 피셔는 '현대인은 일에서 완전히 해방돼 쉴 수가 없습니다. 항상 대기 중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그녀는 '오염된 시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발견한다. 그리고 아이 엄마인 자신의 시간이 대부분 오염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머릿속에 항상 꽉 차 있어서 쉬는 시간조차도 마치 테이프가 돌아가듯이 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그 시간을 끊임없이 방해했던 것이다. 원인은 역할 과부하와 높은 업무 밀도에 있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새로운 영웅으로 부상하고 실리콘밸리 신화가 사람들에게 칭송되면서 IT 업계처럼 며칠씩 밤을 새우고 온종일 일하는 문화가 점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중독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비슷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정당화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라도 바쁘고 알차게 살지 않으면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 여가가 실종된 이유는 '일'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이 일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꿈=직업'이란 공식이 의미하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나는 자신의 여행을 '작업'으로, 놀이를 '취재'로, '낮잠'을 뇌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운동을 '칼로리 태우기'로 끝없이 바꾸어 말하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그것이 자기 계발에 대한 끝없는 압박 때문에 생긴 일종의 강박증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삶'만이 의미 있다는 생각이 복음처럼 전파된 탓에 우리는 '쉬는 법' 혹은 '제대로 여가를 즐기는 법'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가서도 그 도시의 일부가 되어 스미는 것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얼굴을 찍어 SNS에 올리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보여지는 삶이 이토록 중요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도무지 쉴 틈이 없다.

"살 날이 5년 내지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시간 시야'는 좁아지고,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양가감정은 더 확실한 감정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쉬워진다. 이제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시간 시야를 변화시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에게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카스텐슨은 말한다. '할머니가 된 뒤로는 나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손주들과 함께 있을 때 진짜로 함께 있어주려 하죠.'"

사실 어떤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느낌을 받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10시간을 쉬었는데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 시간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 시야'는 시간 일탈 현상에 대한 훌륭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내가 제안하는 건 당장 멀티태스킹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보며 친구와 대화하거나 컴퓨터 창을 여러 개 열어놓고 이메일 쓰기와 책 읽기를 동시에 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어떤 것에도 완전히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은 그렇게 조각난다. 본질은 결국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깊이 체험하며 그 시간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타임 푸어―브리짓 슐트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