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이란의 이슬람 종파(宗派)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양측과 긴밀한 협력 관계인 미국이 어느 편도 들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최근 이슬람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가 자국 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했는데, 이런 조치가 시아파 맹주인 이란 등을 자극해 '수니 대 시아파' 분쟁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와 알자지라 등 미국과 아랍권 매체들은 5일 "미국이 작년까지 적대국이었던 이란과 핵협상을 타결하는 등 양국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고 있었는데, 사우디·이란 관계가 경색되면서 미국의 중동 외교가 꼬여버렸다"고 전했다. NYT는 "미국의 우방국 사우디가 반대 종파 성직자를 처형하며 종교 갈등을 조장하는 문제를 일으켰다"며 "이는 미국이 중시하는 인권과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에 반할 뿐 아니라 최근 '이슬람국가(IS) 사태'로 대두된 이슬람 극단주의를 악화시킨다는 점에서도 큰 문제"라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이 사우디에서 멀어지고 이란 쪽으로 더 협력 관계를 강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석유 에너지 확보와 중동 내 영향력 유지 등을 이유로 1930년대부터 사우디와 경제·안보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대체 에너지 개발과 공급 과잉에 따른 유가(油價) 폭락으로,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국력이 위축되면서 양국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알자리라는 "작년 이란 핵협상이 타결되면서 중동 외교와 관련한 미국의 사우디 의존도가 더 약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30여 년간 반미(反美) 국가였던 이란은 2013년 온건파 성직자 하산 로하니 대통령 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 협조적 태도를 보여 왔고, 결국 핵협상 타결을 이끌어냈다. 이란은 특히 협상 타결 이후 핵개발 시설 축소를 골자로 한 국제사회 요구를 충실히 이행해 올 상반기 경제 제재 해제를 앞두고 있다. 북한과 엮여 핵무기·테러 국가 의혹을 받던 이란이 '정상 국가'로 거듭난다는 기대감에 최근 지멘스·로레알 등 유럽 대기업들의 투자가 몰리고 있다.
사우디가 미국의 강한 반대에도 이슬람 근본주의를 중동·아프리카뿐 아니라 아시아·서방까지 '수출'함에 따라 양측 외교 갈등이 깊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마틴 인딕 브루킹스 연구소 부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과 사우디가 특정 사안을 두고 자주 충돌했다"고 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케리 장관은 주미 사우디 대사에게 "시리아 내 극단주의 성향의 무장세력 지원을 중단하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반면 이란은 IS 사태가 벌어진 시리아·이라크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이 정부들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미국에 큰 도움이 된다. 이란을 당장 IS 격퇴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IS 격퇴전과 관련한 군사 정보를 공유할 여지는 크다.
사우디가 외교 충돌이 충분히 예견되는데 시아파 성직자를 공개적으로 사형한 것은 이러한 미국과 이란 간 해빙 무드를 깨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다. 사우디는 "이란이 핵협상 합의안을 이행하는 듯하지만, 언제 다른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며 "'뱀의 머리'인 이란을 믿지 말라"고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무부 대변인은 5일 정례 브리핑에서 "최근 이란이 실시한 탄도미사일 시험과 관련해 제재를 가할 준비가 됐고, 관련 사항을 검토 중"이라며 이란과 한 발짝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압달라 알무알리니 사우디 UN 대사는 국제적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란이 다른 나라 내정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면 정상 관계가 될 수 있다"며 책임을 이란에 돌렸다. 이번 사태로 스위스에서 열릴 시리아 평화회담이 결렬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일자,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시리아 평화회담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