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신춘문예] 상식의 속도

조선일보
  • 원재운
  • 김인숙(소설가)
  • 성석제(소설가)
입력 2016.01.01 06:14

[단편소설 당선작/당선소감/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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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큐비에르 매트릭스 (Alcubierre Matrix) ; 교통의 진보는 곧 인류의 진보였다. 먼 곳을 꿈꿀수록 세상은 좁아졌다. 선명해졌다. 그러나 미답의 별들은 환상처럼 반짝였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은 9년 전의 모습을 보여줬다. 성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St. Albert Einstein)이 상대성이론을 통해 천명한, "모든 양의 질량을 가진 물체는 진공상태에서의 빛보다 빨리 이동할 수 없다."는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적이다. 무한에 가까워진 세상, 다가갈 수 없는 별,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어려운, 속도의 문제였다.

두 발로만 섰던 시절의 선조들은 사냥의 성공을 바라며 동굴에 벽화를 새겼다. 장 에티엔 르누아르(Jean Etienne Lenoir)의 발명이 있자 많은 창작물들이 내연기관의 앞날을 논했다. 먼 곳을 향한 꿈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 미합중국의 SF 프랜차이즈 시리즈 'Star Trek'에는 '워프 드라이브'란 기술이 등장했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창작물 'Star Wars'는 '초공간 도약'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여타 창작물들 역시 난제를 풀기 위한 가설을 고안했지만, 워프 드라이브는 인류가 실현해낸 초장거리항법기술 알큐비에르 매트릭스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초공간 도약을 비롯한 다른 것들과는 차별화된다. 'Star Trek'이 그려낸 멋스러운 밑그림에, 후대는 아름다운 채색을 해낸 것이다.

여기 평범한 배 한 척이 떠 있다. 배의 앞쪽 수면을 낮추고, 뒤쪽은 높인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수평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흐름을 따라 배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움직인다. 수면의 높낮이 차이가 클수록 속도는 올라간다.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주선이 향하는 방향을 기준으로 앞쪽의 공간을 접는 동시에 뒤쪽의 공간을 늘린다. 압축되고 팽창된 공간 역시 제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속도는 조작된 공간의 양에 따라 좌우된다.

알큐비에르 매트릭스는 우주선을 중심으로 워프 필드라 불리는 영역을 설정하여 공간을 주무르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전진하는 것은 설정된 공간, 즉 워프 필드 자체다. 우주선은 필드의 중심에 고정된 채다. 나아가는 공간에 선체를 맡기는 것이다. 때문에 필드 내 공간에 대한 우주선의 상대속도는 0에 머무른다. 빛의 속도를 돌파한다 해도, 이동의 주체는 양의 질량을 가진 우주선이 아니라 워프 필드라 불리는 일정한 공간이기에 상대성 이론을 위배하지 않는다. 승무원들은 중력가속도의 영향에서 자유로우며, 생존보장을 위한 특별한 수단은 불필요하다. 그저 살아가면 된다. 이 이상의 지식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알아야 할 사실은 알큐비에르 매트릭스의 핵심개념이 오백여 년을 넘은 지금까지도 계승 및 발전되어 각종 우주선에 쓰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구에서 35광년 떨어진 쌍둥이자리의 폴룩스까지 닿는 시간이 단 58일로 줄었다는 것이다.

브레이브 호 (The Brave) ; 태양계 바깥을 탐험한 최초의 유인우주선이자, 알큐비에르 매트릭스가 탑재된 첫 우주선. UE(United Earth)가 주도한 우주개발 50개년 계획의 첫 성취였다. 전장 220m, 전폭 84.4m. 승무원 731명. 취역연도는 AD. 2841년이며, 출발한 지 142일 만에 쌍둥이자리의 카스토르 근처에서 외계종족 젬(Gem)에 의해 격추당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발견된 잔해들 사이에는 메인 엔지니어 존 바티스타의 헤드기어가 있었다. 그는 헤드기어의 메모리에 일기를 쓰듯 음성을 녹음했다. 이하는 메모리 속의 기록을 발췌 및 정리한 것이다. 브레이브호 승무원들의 생활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아내'와 '딸' 같은 어휘의 의미는 해당항목을 통해 알아보길 바란다.

"어떤 날에 대해 기록할 때에는 흔히 날씨 이야기를 먼저 하곤 한다. 하지만 날씨를 떠올리는 일이 생경하다면 무엇부터 기록해야 하는 것일까. 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온통 검다. 나를 포함한 탑승자들은 바깥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다. 계속 검다. 워프 필드 안의 선체는 중심에 머무른 채로 사방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나아간다. 나아가지만 나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나아가지만 나아가지 않는 곳에 머물러서인가, 가끔은 내 몸의 일부가 지구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구로 귀환해도 아내는 세상에 없을 터다. 대신 나이 든 딸이 아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반 승무원은 지원자들 중 연고자가 없는 이들을 주로 선발하여 훈련시켰지만, 지휘 계통이나 기술자 계열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나른한 흥분이 승무원들 사이를 감돌았다. 매트릭스를 가동하고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승무원들은 업무 외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늘 같은 창밖을 무시하고 선체 내부로 침잠한다. 헤드기어다. 업무를 마친 이들에게 주어지는 무한의 자유. 연고자 문제보다 우선시한 것은 인공현실에 대한 적응도였다. 헤드기어는 사용자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따른 세계를 구현하는데, 특별한 요구가 없다면 스스로 사용자의 심상을 읽고 알맞은 환상을 짜낸다. 가족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은 가상의 반려자와 더불어 아이를 키운다. 반대의 성별이 되어 관계를 해본다. 고대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최전방, 첨단부에 서서 말을 타고 내달린다. 실력 좋은 요리사나 건축가가 되어 이것저것 만들며 기꺼워하기도 한다. 나른한 흥분은 이곳에서만 유지된다. 반짝이거나, 끓거나, 타오르거나, 얼 수도 있다. 나는 화가가 된다. 어렸을 적 꿈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는 어쩐지 부끄러워 들지 못했던 붓을, 헤드기어를 쓰고는 마음껏 쥘 수 있다. 행복한 아내와 행복한 딸과 행복한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헤드기어를 거의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선장의 경우다. 선장은 배의 모든 상황을 항시 알고 있어야 한다며 대부분의 시간을 주조종실에서 보낸다. 그런 선장도 모두의 앞에서 헤드기어를 쓸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선장을 포함한 모두가 헤드기어를 착용하게 만드는 공간이 있다. 진공포장지에 동결 건조시킨 우주식량은 혀의 이상을 의심케 하는 동시에 눈을 괴롭힌다. 딱딱한 사각형의 토마토 파스타 같은 것들이 그렇다. 때문에 선체 내에서 제일 조용한 곳은 식당이다. 승무원들은 우주식량을 씹으며 머리에 쓴 헤드기어에 감각을 맡긴다. 서니사이드업 계란프라이와 베이컨 두 조각이면 업무의 능률이 오르고, 스테이크나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 아령을 들고 운동도 할 수 있다. 포도주를 마시면 무중력에 몸을 던지고 아내와 딸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도 있다. 헤드기어 덕분에 살이 찌고 있는 해리 같은 친구도 있다. 가끔 특식으로 작은 텃밭에서 자외선으로 키운 감자가 나오긴 한다. 모자라다.

알큐비에르 매트릭스 가동 중엔 여덟 시간 단위로 점검의 일상이 반복된다. 브레이브호는 기존의 우주선과 다르다. 기다란 막대기 형태의 본체가 있고, 두 개의 원형 구조물이 선체를 감싸고 있다. 이 원통의 회전에 시공간을 접는 비밀이 있다. 워프 필드의 설정은 물론, 종료 시에 방출되는 에너지를 사방으로 흘려보내는 조건까지 충족하는 구조다. 엔지니어들에게는 불만족스럽다. 단순하게 면적이 넓어진 것만으로도 손 가는 곳이 많아지는데, 회전이라는 복잡한 구동까지 한다. 워프 시에는 선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기관실 내부에서 기본점검만을 실시한다.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기에 다가오는 사람은 근처에서 일하는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엔진소리만이 바닥을 울린다. 가져온 전동 드라이버와 장비들을 내려놓는다. 헤드기어를 쓴다.

딸의 그림은 이제 채색을 할 차례다. 팔레트에 물감을 짜낸다. 수채화는 유화와 달리 수정이 어렵다. 덧칠하면 색이 탁해지고 종이가 상한다. 처음에는 한 폭마다 수십 장을 구겨야 했다. 이제 종이는 내 붓이 고른 색채를 머금어 화려하게 꽃피운다. 딸이 아름다워질수록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물통은 탁해진다. 물통 곁에는 한 무더기의 편지가 놓여 있다. 헤드기어가 멋대로 가져다 둔 것이다. 나는 저것들을 펴 보지 않았다. 팔레트를 편지더미 위에 올려놓고 바람을 부른다. 종이를 말리기 위해서다. 문득 고향, 아칸소가 떠오른다. 미시시피를 향해 동서로 흐르는 강은 구릉과 계곡을 지나며 곳곳에 호수를 만들었다. 큰 줄기에 닿지 못하고 고인 물은 한을 풀려는 듯 계속해서 근처의 땅을 적셨다. 진흙 위로 부는 계절풍은 때로는 심심했고 때로는 달달했다.

달콤한 바람이 석양에 스며들 때면, 사람들은 호숫가의 한적한 술집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 사랑을 읊는 시의 한 구절, 흙바닥을 떠나 아스팔트를 밟겠다는 외침이 물결 위로 흩어졌다. 아내와 내가 중력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던 고향의 색채와 그림 속 딸의 빛깔은 꼭 닮아 있다. 호숫가에 선 딸을 보고 싶어진다. 풍광을 가져오기로 한다. 자박, 하는 발소리와 함께 그림 속의 딸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황혼이 깃든 드레스 차림의 딸이 내게로 다가온다. 걸음마다 딸은 변모한다. 내가 어느 날엔가 만날 얼굴이 되려다, 되기 전에 멈춘다. 마지막으로 본 아내의 모습이다. 지구를 떠나올 무렵의 아내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그때 같은 얼굴로, 달달한 바람을 혀로 맛보고 있다. 혀가 내 몸을 결박하고 옷을 끌어내린다. 꿈틀거리는 혀가 차갑다. 주변의 풍광이 제멋대로 바뀐다. 호숫가다. 발목이 진흙에 빠진다. 바람이 변한다. 심심하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나를 올려다보는 딸의 눈동자처럼 비어 있다. 딸이 나를 보고 있다. 혀가 자라난다. 프로그램 종료, 란 단어를 계속해서 떠올린다. 해리, 이봐, 해리! 거기 없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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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Zhuge Liang) ; 자는 공명(Kongming), 시호는 충무후(Loyal and Martial Marquis). 생몰 연도 AD. 181-234년. 구 중화인민공화국 후한 말 시기의 실존인물이자, 역사소설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의 등장인물. 촉한의 초대이자 마지막 승상(Imperial Secretariat). 충신의 표본이자 희대의 전략가, 정치가. 유비 사후에는 황자와 동급의 지위인 상국(Chancellor of the State)에 올라 국정을 총괄했다. 나관중의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는 허구가 섞인 소설인지라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나, 진수가 저작한 역사서 'Record of the Three Kingdoms'만으로도 제갈량이 뛰어난 인물임과 동시에 저열했던 당대의 관념과 편견 속에서도 올바른 성정체성을 확립했다는 사실을 추리하기에 충분하다.

'Record of the Three Kingdoms'에 따르면, 제갈량은 "키가 8척에 용모가 출중하여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다."고 한다. 약 189센티미터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작지 않다. 수려하고도 멀끔한 외모의 제갈량은 학창의와 백우선 등 순백색 위주의 아이템들을 활용하며 한 마리 학과 같은 고고함을 드러냈다. 신선 같은 이미지를 표방한 그의 선택이 철저히 계산된 것인지, 단순한 취향이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아내와 살았다. 아내인 황씨는 외모가 추하기로 유명했다. "제갈량에게서 모든 걸 배우되, 여자 보는 안목만은 닮지 말라."는 말이 떠돌았다. 어쨌든 서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인 제갈량에게는 형주의 유력자인 황승언과의 인선이 필요했다. 정략결혼인 탓인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시대였기에, 제갈량의 형 제갈근은 자신의 둘째 아들 제갈교를 동생에게 양자로 보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황씨가 제갈량의 나이 마흔 일곱에 첫 아이를 출산한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제갈량의 성기능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늦게야 아이를 가졌던 것인가. 첩을 두는 것이 누가 되지 않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기능에 이상이 없던 제갈량은 어째서 정략결혼으로 얻은 박색한 아내만을 두고 살았던 것인가.

황씨와의 결혼 후 머지않아, 제갈량은 유비의 초빙을 받아들여 그의 참모가 된다. 유비는 제갈량과 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 하고, 침상을 함께 쓰며 한 시도 곁에서 멀리 두지 않았다.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가 이에 불만을 품자, 유비는 "나에게 공명이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그들의 불만을 일축하였다. 군주의 권위로 시작된 관계인 듯하나, 제갈량으로서는 본인의 성향을 확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제갈량과 애정을 나누었으리라 추정되는 인물은 그가 섬겼던 유비 외에도 둘이 더 있다. 첫 번째 인물은 마속이다. 백미(white brows)란 별명으로 불리던 형주의 명사 마량은 제갈량과 친밀한 사이였다. 마량의 막냇동생인 마속은 자연스럽게 제갈량을 알게 되었다. 제갈량은 마속의 재주를 아껴 그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이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님을 유비가 알게 된 시점은 이릉대전 직전으로 보인다. 이때 유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갈량의 간언을 무시했다. 물에서 벗어난 물고기는 참패했다. 감정이 앞서 대국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유비는 자책하였고, 마음의 병은 곧 몸의 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양가적 심정을 해소하지 못했다. 유비는 제갈량의 손을 잡고 두 마디의 말을 남겼다. "내 아들이 나라를 경륜할 기량이 부족하다면 그대가 황제에 오르라." "마속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인물이니 중히 쓰지 말라." 제갈량은 사랑으로 유비의 말을 모두 어겼다. 상국의 자리에서 유비의 아들 유선을 충실히 보좌했고, 중요한 원정길마다 마속을 대동하며 의견을 물었다.

두 번째 인물은 강유다. 본디 위의 장수였던 강유는 제갈량에 감복하여 촉에 항복한다. 제갈량은 강유를 "마량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인재, 양주 최고의 영걸"이라 평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 형을 빗댄 평을 들은 마속이 유비와 비슷한 실수를 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의 요충지였던 가정(Jieting)을 지키던 마속은, 좁은 산길에 주둔하라던 제갈량의 말을 어기고 언덕에 진을 쳤다. 결국 마속은 위의 장합에게 가정을 빼앗겼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벴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에게 병법을 전수하며 그를 후계자로 키웠다. 홀로 남겨진 강유가 국력을 소진하다시피 하며 제갈량보다도 많은 횟수인 아홉 번의 북벌을 시도했던 것은 먼저 죽은 스승이자 연인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다만 강유의 경우에는 상호간 애정이 있었는지, 혼자만 제갈량을 연모한 것인지 모호한 구석이 있다.

이처럼 유력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동성애자임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탓이다. 국지전에서 대패한 뒤 수비로 일관하는 사마의에게, 제갈량은 여성의 옷과 화장품, 장신구를 보내며 "대장부가 한 번 실패했다고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녀자가 밖이 두려워 집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과 같다."라 적힌 서신을 동봉했다. 사마의에 대한 도발과 더불어 자신이 남성성을 추구하는 인물임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늦은 나이에 아들을 출산한 것도 후자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유비와 마속 생전에는 아이가 없다가, 마속이 죽고 일 년 만에 첫아들을 낳았다는 것 역시 유념할 부분이다. 이런 행적들은 제갈량의 삶 후반부에 몰려 있는데, 본인에 대한 소문이 돌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일부러 벌인 일로 보인다.

진수는 제갈량을 가리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라 평했다. 무결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제갈량은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감추고 속여야 했다. 그가 평생 품고 살았을 심연의 깊이를 알 방도는 없다. 하지만 제갈량이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뒤, 다수의 동양 출신 노트 퀴어들이 각성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천의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갈량의 삶에 울림이 있는 것은 오히려 그가 겪어야 했던 슬픈 고뇌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트 퀴어 (Naught Queer) ; 말 그대로 '무익한 성소수자'들. 인류가 긴 세월에 걸쳐 깨닫고 구축한 이상적 현실에 반하는 이들이란 의미를 담아 '불신자(unbelievers)'라고도 부른다. 무분별한 이성 간 생식행위를 벌여 과도한 번식을 일삼는 무리들이다. 20세기 이후 인류가 품은 대다수의 문제가 인구의 폭증에서 온 것임을 감안하면, 노트 퀴어들의 행태는 반사회적이란 말로 정의하기에 충분하다.

현재 이들은 UE의 세력권이 닿지 않는 남미 최남단의 우수아이아(Ushuaia)에 모여 서식하고 있다. 수는 10만여 명으로 추정되며, 주된 식량조달수단은 어업이다. UE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기에 도시를 다스리는 공고한 공권력은 없다. 치안은 당연히 불안하다. 타 지역과의 교류가 없어 기술수준도 원시적이다. 이러한 악조건을 감수하면서도, 노트 퀴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관을 저들만의 작은 세계에서 끊임없이 내재화하고 재생산한다. 혹자는 이들이 오염된 바다로부터 식량을 얻는 것에 주목하여, 잘못된 사상과 풍습을 이어가는 근본적인 이유로 들기도 한다. 이상 수생생물을 계속해서 섭취한 탓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우수아이아 출신인 아벨 로드리게스의 발언을 통해 이들의 폐쇄성을 살펴볼 수 있다.

"늘 누구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던 부모라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나 남자가 좋은 것 같아, 라고 말하자마자 날 도시 내의 유일한 정신병동에 데려가더군요. 처음 보는 의사선생은 수염이 허옇게 자란 노인이었습니다. 부모가 절 진료실에 두고 나가자마자, 그는 내 바지를 벗겼습니다. 내 아랫도리를 만지면서 기분이 좋냐 묻더군요. 당연히 안 좋죠. 상대가 미남이든 미녀든 어린애든 노인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 그러면 안 좋은 게 당연하잖습니까.

상식의 속도 일러스트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노인은 무조건 존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난 도망치지도, 싫다는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본인이 바지를 벗으려 하더군요. 기분이 더러워서 죽어버릴 것 같다고 말했지요. 의사는 옷을 추스르고 바로 부모님을 불렀습니다. 근엄하게 지껄이더군요. 이제 치료되었습니다. 부모는 활짝 웃었죠. 진료실에서 나가기 전, 부모 둘과 의사, 나까지 넷은 둥글게 모여앉았습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지금 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이 생각밖엔 들지 않았어요. 그러니 여긴 정말 대단하고, 멋진 곳입니다!"

증언에서 보다시피, 노트 퀴어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족주의에 대한 무한한 신봉이다. '가족'이란 구 사회에서 자웅의 배우자와 혈연관계에 근거하여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를 뜻한다. 이 사상이 주류였던 시절에도 재고의 여론은 팽배했다. 문화의 형성기부터 혈연과 가족을 중시해온 동양권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한 예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한 소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 'The Little Dinosaur Dooly'를 들 수 있다.

이 창작물의 등장인물로는 가장 고길동을 중심으로 한 직계가족들, 직계는 아니나 혈연으로 떠맡게 된 아기 희동이, 유사가족 형태로 함께 사는 중생대의 공룡 둘리, 깐따삐야 별의 외계인 도우너, 아프리카 타조 또치가 있다. 이 중 둘리를 필두로 한 도우너, 또치 셋은 일종의 혁명집단이다. 사회의 바깥에서 온 이들은 가족주의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활용하며 혁명의 기수로 거듭난다. 둘리는 염력과 투시력 등 다양한 초능력을 발휘한다. 도우너가 소유한 타임 코스모스는 원하는 시공간으로의 도약을 가능케 한다. 또치는 서커스단 출신으로 사회경험이 적지 않아 처세에 능하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둘리 일행은 가족주의의 핵심인 가부장, 즉 고길동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수집한 레코드판과 양주병을 전부 박살낸다. 은행을 건물째로 뽑아와 강도교사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맹수가 그득한 밀림에 버려두고 온다. 지붕을 수차례 날리며 두 번은 집을 아예 철거하게 만든다.

조롱의 의미를 담아 항상 내밀고 있는 혓바닥과 함께, 혁명의 구호 'Hoi!'를 외치며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고도, 둘리는 실패한다. 비극적 결말을 향한 복선은 작중 빈틈없이 제시된다. 고길동 가족은 재난에 가까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둘리 일행을 쫓아내지 않는다. 고길동의 아내 박정자가 주장한 "희동이를 잘 돌봐준다."는 이유에서다. 끝내 둘리가 가족주의에 편입될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또한 전문교육자가 없는 가운데의 육아가 얼마나 지난한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편 고길동은 자신도 모르는 새 유사가족인 둘리 일행을 혈연가족처럼 여기게 된다. 둘리 일행의 저항활동에 지친 고길동은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는데, 그렇게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데다 인간도 아닌 둘리 일행의 장례를 정식으로 치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관을 짜고, 곡을 하고, 매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결국 이 작품의 둘리 일행과 고길동, 양자는 가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여 정신적 성장이 결여된 모습을 보인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단련된 사상이 없던 둘리는 초월적 힘을 가지고도 오류투성이인 지배체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반대로 당대의 논리에 함몰되어 비합리적 사고를 갖춘 고길동은 육아의 험난함과 구성원에 대한 책임감 탓에 엄연한 반체제집단인 둘리 일행을 억지로 포용한다. 이처럼 가족주의 하의 개인은 허황된 감성에 이끌려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해진다. 교육의 측면에서도 책임의식과 전문성이 떨어져 구성원의 올바른 사회화를 담보하기 어렵다. 실리적 기능이 결여된 가족제도는 '정서'에 모든 기능을 집중하여 한동안 명맥을 유지했으나, 이제 대다수의 인류에게는 체계적인 교육 하에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노트 퀴어는 역사발전과정에서 낙오한 이들이며, 현 인류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하는 거울과도 같다.

젬 (Gem) ; 인류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외계생명체. 최초의 조우가 있었던 쌍둥이자리(Gemini)의 이름을 따 '젬'이라 명명하였다. 첫 접촉에서 브레이브호를 격추시켰고, 곧바로 지구로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이를 요격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전쟁은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거주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행성이 발견된 후에도 이주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이들의 존재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점성을 갖춘 흙덩이와 비슷한 외견을 하고 있는데, 정해진 형태가 없다. 찰흙공예품처럼 자유자재로 변화한다. 사람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는지는 불명이다. 크기 또한 매우 다양하다. 관측된 개체 중 최대 크기는 전장 1킬로미터이며, 최소는 2미터가 조금 못 된다. 크기를 제외하면 개체들 사이에서 개성이라 부를 만큼의 유의미한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데, 이 크기의 차이도 개체들이 서로 달라붙거나 흩어지며 발생한다. 집단지성체, 즉 미미한 지능을 지닌 다수가 모여 개별개체의 지적능력을 넘어서는 유형의 생물로 보인다. 이성과 감성의 양자를 갖췄는지는 불확실하다. 자체적으로 특수한 전파를 내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전파에는 첨단장비의 작동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 공격에 사용하기엔 발현시간이 매우 짧다. 정확히 어떤 때에 방출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류를 향한 맹목적인 적대감의 원천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사실 또한 적의다. 적의의 폭발이 가져온 비열함인지, 이들이 처음 지구로 접근할 때의 외양은 이미 대파한 브레이브호에서 따온 모습이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의태능력으로 UE 산하 지구연합군 측 전함 및 병기의 외양과 기능을 그대로 복제한다. 병력의 질과 양의 측면을 넘어 최근에는 전략과 전술의 형태 및 개념까지도 유사해지는 추세다. 이들의 미개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학습력은 뛰어날지 모르나, 스스로 방법을 모색하고 답을 찾는 능력은 없다. 능동적으로 현실을 개변하며 이상을 추구해온 인류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부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젬의 출현이 창설 초기 UE의 인류 통일 활동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명무실해진 종교의 박멸, 갈등을 조장하는 민족주의의 말살부터 공용어 및 문자의 선정, 각종 범죄자의 척결 등 지지부진했던 일들에 힘이 붙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지만, 진정한 합일을 위한 성장통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통합을 이룬 인류에게 승리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의 UE 측은 '아벨의 지팡이(Rod from Abel)' 등 뛰어난 화력의 신병기를 다수 개발,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젬의 무리를 저격하는 전략을 통해 연승을 거두고 있다. 현재 최전선은 해왕성과 명왕성 사이의 카이퍼 벨트에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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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로드리게스 (Abel Rodroguez) ; 원인 모를 병으로 스물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권운동가. 우수아이아에서 태어나 자라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UE 측으로 귀순했다. 귀순한 아벨은 양쪽 발에 각기 다른 색깔의 양말을 신은 수행원과 함께 발바닥에 티눈이 자라도록 각종 촬영, 강연, 인터뷰를 다녔다. 그가 가장 자주 한 말은 "여긴 정말 대단하고, 멋진 곳입니다!"로 알려져 있다. 굳건한 의지로 무장하고 계몽에 앞장섰던 아벨이지만, 교육전문가에 의한 집단양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는 약간의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아벨은 감탄과 비슷한 횟수로, 카메라가 꺼지고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없겠습니까?"

질문이 감탄보다 많았던 어느 날, 수행원은 묵묵히 아벨을 어디론가 인도했다. 아벨은 지나치게 조용한 수행원이 적잖이 못마땅했다. 수행원은 침묵이야말로 남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취향은 밝고 활달한 사람이니까, 좀 그렇게 해 달란 말이야." 일어난 아랫도리에 오일을 바르며 아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양말 좀 짝짝이로 신지 마, 제발." 수행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밤은 언제나 노를 잃은 배처럼 흘러갔다. 적어도 아벨에게는 그랬다. 전날도 마찬가지였기에,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손을 잡아끄는 수행원을 보며 아벨은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딸꾹질을 꾹 눌러 참았다.

텍사스는 세계에 몇 없는 성지(the Holy Land)들 가운데 손에 꼽히는 지역이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구 미합중국은 갓 독립한 신생국가였다. 가진 것이 없었던 이들은 가져야 할 것을 갖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달리는 것으로 절실함을 해결했던 개척자의 얼은 모래먼지 속에 여전히 녹아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최대 규모의 어패류양식장이 있다는 사실은 나름의 의미가 없지 않다고, 수행원은 말했다. "절실함의 완성이니까요." 아벨은 눈앞의 어패류양식장을 보았다. 보려 애썼다. 인간의 눈은 산맥이나 바다를 한눈에 품을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파도가 철썩이며 다가와야 할 곳에 덮인 두꺼운 철골과, 철골 위로 드높이 뻗은 유리가 이곳이 바다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해류를 따라 물결이 휘돌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똑똑. 유리벽은 두꺼웠다. 아벨은 고개를 들었다. 바다 위 하늘의 색깔은 아벨이 등진 쪽과 사뭇 달랐다. 청명하고도 적요했다. 수행원은 아벨에게 일련의 정보를 보냈다. 홀로그램을 통해 양식장과 인근의 지리가 상세히 떠올랐다. 하단에는 해류와 염도, 깊이와 환경이 일천 년 전 천연의 바다와 똑 같다고 적혀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서서 양식장을 바라보던 아벨은, 늘어선 철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아벨의 오른편으로는 노랗게 마른 풀이 대지를 덮고 있었다. 왼편으로는 천 년을 담보한 바다가 햇빛을 융단처럼 늘어뜨리며 넘실댔다. 바다 멀리서 돌고래 무리가 뛰어오르며 하얗고 많은 포말을 일으켰다. 아벨은 그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동안만 잠시 멈췄다. 잠시였다. 해가 시들며 시름시름 앓아갈 때에도 아벨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걷고, 또 걸었다. 생각을 사냥하는 아벨의 등을 바라보던 수행원은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누군가가 야영장비를 갖추고 나타난 것은 정확히 해가 지평선 너머로 늘어진 뒤였다. 구식 장비였지만 휴대가 간편했다. 누군가는 돌아갔고, 텐트 안에서 수행원은 아벨의 양말을 벗겼다. 갈라진 티눈이 붉은 피를 뿜고 있었다. 수행원은 왜 이렇게 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벨의 입이 열렸다.

"물고기는 눈치가 빨라. 잡기가 쉽지 않지. 조금만 다가가도 저 멀리 도망쳐버려. 어렸을 때는 멋도 모르고 맨손으로 잡으려다가 번번이 실패했어.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지. 엄청나게 억울해서, 집에 가자마자 어머니께 울면서 안겼어. 어머니는 이러더군. 내 양쪽 관자놀이를 가리키면서. 물고기는 여기에 눈이 붙어 있어서 두 곳을 한꺼번에 볼 수 있지."

"상처 처치는 됐습니다. 옷을 벗고 누우시죠."

"눈치든 뭐든, 빠르다는 건 부러운 일이잖아. 그래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했어. 그렇잖아.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어."

"며칠만 걷지 않고 푹 쉬면 나을 겁니다. 티눈도 곧 떨어지겠지요."

수행원의 손을 빌려 자리에 누운 아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포가 강마른 아벨의 몸을 덮었다. 불을 끈 수행원이 빈자리에 누웠다. 아벨의 목소리가 어둠뿐인 텐트 속을 떠돌았다.

"우리는 앞만 볼 수 있는 대신 미끼를 물지 않을 지혜를 갖추었단다."

아침이 밝아오자 아벨은 다시 걸었다. 야영장비를 챙겨든 수행원도 전날처럼 따라 걸었다. 낮의 두 사람 사이는 곁의 바다처럼 조용했다. 밤이면 텐트 안에서 발을 치료했고, 섹스를 했으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노를 젓는 역할은 대부분 아벨이 도맡았다. 수행원은 배에 올라탄 이가 주변의 경치를 눈에 담듯 아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아벨이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았던 일과 청년기에 익혔던 낚시 기술들, 대량 어획을 위한 협업의 과정, 지느러미가 여덟 개 달린 생선의 생태, 돌고래가 목숨을 구해준 누군가의 일화, 커다란 바다거북의 껍질로 만든 류트, 우수아이아가 가을을 입었을 때 거리에 내려앉는 아름다움, 좁다란 골목을 휘도는 바람에 지배당했던 첫사랑을 알게 되었다. "만약 그 노인이 내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그리고서 내게 동침하자고 하지 않았으면, 난 이곳으로 건너오지 않았을 거야." 같은 이야기는 수행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불신자였던 자가 말하는 불신자들의 이야기가 쌓일수록, 수행원은 근처의 풍광이 생소해지는 것을 느꼈다. 키 작은 나무들은 과달루페 산맥의 대지 위로 껍데기를 떨구고 새 피부를 얻었다. 퇴적사암으로 된 민둥산들이 달을 여유롭게 떠받쳤다. 이따금 큰 뿔을 가진 양의 무리가 용설란 군집을 헤집으며 나타났다. 양들은 두 사람을 멀거니 보다 사라지곤 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때마다 수행원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잃도록 건설된 바다만큼은 전혀 생소해지지 않았다.

물론 수행원은 생소함이 착각 비슷한 것임을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바람은 종종 개척자처럼 내달리며 흙먼지를 몰고 왔다. 발목에 먼지 자국이 찍힐 때마다 수행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시간을 이만큼 도난당했다는 사실에 놀라며 야영준비를 서두르곤 했다. 사실 착각 비슷한 것이 없었더라도 달라질 일은 아니었다. 우주 단위의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것은 상대성이론이 밝힌 보편적 진리였다. 진리를 생각하던 수행원은 문득 노를 쥐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티눈을 치료하며 알큐비에르 매트릭스와 브레이브호, 젬의 이야기를 아벨에게 들려주었다. 아벨은 "나아가지만 나아가지 않는다고?"라 말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고, "싸움밖에 모르는 녀석들이라니, 멋지군."이라 말하여 수행원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이해하지 못한 수행원은 이곳의 바람이 우수아이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하고 생각하다 소독약을 지나치게 들이부었다. 아벨의 티눈은 계속해서 덧났다. 그럼에도 아픔을 모르는 사람처럼 앞서 걷는 아벨의 등은 착각 비슷한 것과 겹치며 수행원에게 날짜의 구분을 잊게 했다. UE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소집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삼 년마다 사람들은 사랑을 나눌 상대를 바꿔야 한다. 페닐에틸아민의 분비기간이 끝나면 다가오는 것은 이해를 빙자한 오해뿐이다. 아벨과 수행원은 어패류양식장의 채 반도 돌지 못했다. 다시 나타난 누군가는 두 사람을 비행정에 태우고는 도심지를 향해 날았다. 그제야 아벨은 완성된 절실함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거대하고도 투명한 유리가 바다 비슷한 것을 뚜껑처럼 덮고 있었다. 수행원이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돌고래 한 무리가 수면을 박차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보았던 그 무리 같았다. 아벨은 언제나 미소 짓듯 올라가 있던 녀석들의 입꼬리를 떠올렸다. 돌고래 무리가 자취를 감췄다. 수면 위의 파문도 뒤를 따르듯,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꽤 떠올랐는데도 수평선은 끝나지 않았다. 창 너머를 바라보는 아벨을 향해 수행원은 입을 열었다. 그는 아벨과 함께했던 삼 년의 시간을 떠올렸고, 지난밤 동안 아벨이 했던 이야기들을 되짚었다. 생각의 끝에서 수행원은 왜 자신이 양말을 각기 다른 색으로 신는지 서툴게나마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행원이 말을 시작하려는 순간, 아벨의 목소리가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어머니, 온통 미끼뿐입니다. 웃음밖에 안 나올 정도로," 아벨은 고개를 한껏 들었다. "이 세ㅅㅏㅇ ㅂㅏ… ㄲ……

경고. 경고. 제1종 경계경보발령. 해킹으로 의심되는 불온한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정보제시를 강제 중단합니다. 불신자로 추정되는 자를 포착, 진원지인 당신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 려던 아침의 햇살이 펼치는 속임수로 물들인 빵 속 세 번째 영혼이 껍질을 벗는 아기를 잉태하고 분홍빛 볼따구니로 억겁을 가라앉는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려진 과녁을 꿰뚫는 화살 끝이 붉은 것을 더욱 붉게, 붉은, 것을? 더욱! 붉게, 먹자마자 배설하는 혓바늘이 깨지고 나타난 사랑은 자라는 땀구멍, 천상에서도 가장 불구인 음악, 어제 절반 정도 먹다 남은 속눈썹 위에 누운 책의 맛은 고라니 꼬리곰탕에 모래와 소금을 적절히 친 당신, 당신의, 당신의 권한을 인정합니다. 제1종 경계경보해제. 최고위 등급의 정보 열람 및 편집, 새로운 항목의 생성이 가능합니다. 원하는 동작을 말씀해주십시오.

브레이브호의 블랙박스 (Black Box of The Brave) ; 주조종실, 격납고, 휴게실, 연구실, 기관실의 총 다섯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회수된 것은 기관실에 있던 단 하나였다. 그마저도 영상정보의 일부는 노이즈가 심하게 끼거나 소실되었으며, 음성정보는 전부 누락되어 있었다. 제시되는 대화들은 화면 속 인물들의 입술을 읽어낸 것이다. 신뢰도는 약 70퍼센트 전후다. 모든 대화가 그러하듯이.

해리, 이봐, 해리! 거기 없나! 헤드기어를 억지로 벗어던진 존 바티스타가 힘없이 주저앉는다. 가상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는 권장되지 않는 행동이다. 마약을 오남용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역전하는 오감의 신호에 뇌가 심대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때문인지 존은 눈앞에 선 흙덩어리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본 뒤에야 눈을 크게 뜬다. 존의 우주복은 허리부터 기묘한 형태로 찢어져 아랫도리가 노출된 상태다. 강제로 잡아 뜯은 모양새지만, 존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다. 고개를 든 존은 흙덩어리와 눈을 맞춘다.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이는, 사람 모양을 한 흙덩어리다. 흙덩어리는 존의 시선을 받으며 길게 자란 혀를 회수한다. 입이 닫힌 그것의 몸이 변화한다. 가까운 달처럼 거무튀튀한 흙색이, 머나먼 달처럼 빛을 받은 살구색으로 탈바꿈한다.

. (데이터 삭제를 뜻하는 표시 / 편집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것이 천천히 존에게로 다가간다. 무릎을 꿇고 몸을 기울인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소담스레 부푼 가슴이 엿보인다. 존은 한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리누른다. 그것이 고개를 갸웃한다. 입을 연다. 오, 어, 왜? 존은 남은 손을 휘저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뒤편에는 챙겨온 장비들이 있다. 가, 까이. 둘의 거리는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계속해서 얼굴을 바꾼다. 존의 아내, 딸을 지나 해리, 선장을 비롯한 브레이브호 승무원들의 얼굴까지 주파한다. .

아빠, 가까이 와. 와요. 이래야 좋, 은가요? 얼굴이 바뀌는 그것의 입술은 내려앉지 못하고 흩날리듯 움직인다.

위태로운 달싹거림이 끝나고, 남은 것은 존의 얼굴이다. 존이 헤드기어를 쓰고 수없이 그린, 행복한 아내와 행복한 딸과 함께인 행복한 자신의 표정이다. 아아아, 존은 크게 입을 벌린다. 그의 오른손이 전동 드라이버를 움켜쥔다.

피부 곳곳이 다시 검질긴 흙빛으로 물들어 있다. 흙덩이 부분은 살구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거뭇해진 그것의 손은 전동 드라이버를 쥐고 있다. 그것은 전동 드라이버를 유심히 살펴본다. 뒤집어도 보고, 흔들어도 보고, 날 쪽으로 잡아도 본다. 다시 손잡이를 쥐고 스위치를 켠다. 맹렬한 회전이 시작된다. 전동 드라이버가 존의 몸을 찌른다. 드라이버를 다루는 그것의 손은 부드럽고, 세심하며, 정성스럽다. 피가 방울지며 떠오른다. 공기정화기의 수분흡수량을 아득히 초과하는 양이다. 무수한 핏방울이 둘 사이를 맴돈다. 그것은 대답을 바라듯 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붙인다. 똑같은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본다. 이렇게 하면, 되, 는 건가, 요? 당연하게도, 존은 반응이 없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것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핏방울을 잡으려 시도해본다.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어오르다 기관실 벽에 부딪친다. 다음에는 발을 바닥에 붙이고 팔을 늘려본다. 이내 어렵다고 느꼈는지, 그것은 몸을 바싹 웅크려 다시 존의 곁에 앉는다. 그리고는 늘어진 존의 입술에 제 젖을 물린다.

그것은 전동 드라이버를 들고 걸어간다. 화면에 남은 것은 과묵한 존의 사체와, 행성이 우주를 떠다니듯 부유하는 주홍물방울뿐이다.

블랙박스의 유의미한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발견된 브레이브호의 사망자는 모두 전동 드라이버에 몸 곳곳이 뚫린 모습이었다.

당신의 권한으로 새로운 항목을 생성합니다. 작성을 시작해 주십시오.

<끝>

[소설 당선소감] 잊지 않겠습니다… 스물다섯 그 늦가을

원재운
살아가는 동안 소설을 쓰기로 다짐했던 건 스물다섯 늦가을의 일이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가족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학교에 나가 선생님들, 학우들과 고민하고 토론하고, 연인을 만나 기억을 나눠 갖고. 늘처럼 흘렀던 하루와 하루 사이에서였다. 시간도 공간도 증발한 어떤 순간에서 무한한 간격이 소모되었다. 고독해졌다. 살아가는 동안 반짝였거나, 끓었거나, 타올랐거나, 얼어붙었던 일들을 하나씩 집어 저울에 올려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람들 덕분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들. 두. 장영우, 이장욱, 박성원, 백가흠 등 깊은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들. 겐타리와 성수노. 대사형과 성사제를 비롯하여 길 없는 곳에서 만난 모든 학우와 I.D의 동생들에게. 부족한 작품을 눈여겨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마지막으로 스물다섯 살의 나에게. 무게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살아가는 동안.

-1986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 문예창작전공 석사과정 수료

[소설 부문 심사평] 팽팽한 문장, 활달한 상상… '상식 밖' 문제작 탄생

김인숙(소설가)·성석제(소설가)
김인숙(소설가)·성석제(소설가)
본심으로 넘어온 열다섯 편 내외의 작품은 오늘의 한국 문학 기류와 잠재 역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고투하는 개인들이 여전히 존재했고, 관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확실해지기도 전에 소설의 배에 몸을 던지는 바람에 스스로와 독자를 힘들게 하는 작품도 많았다.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 가운데 박유경의 〈블루홀〉은 가장 안정되고 차분한 톤을 유지하면서 종착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블루홀'이라는 소재만 빼면 이미 너무도 익숙한 서사이고 작중 인물이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게 지적되었다.

이유미의 〈렌트 프렌드〉 역시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독특한 표현과 문어체적이고 압축적인 문장이 강점이긴 하지만 신춘문예가 기대하는 강렬한 새로움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고독'이 핵심적인 단어이긴 하나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소설의 힘이 소진되고 만 느낌이다. 범수의 〈대항해시대〉는 제목처럼 화려하다. 바둑, 올드린의 자서전, 달, 연애, 결혼, 죽음까지 단편소설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듯한 소재를 힘을 다해 요리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재료가 충분히 영글었는지, 이야기가 불특정한 독자 대부분이 납득할 수 있도록 발효되었는지 좀 더 살폈어야 했다.

당선작인 원재운의 〈상식의 속도〉는 혜성처럼 뜨겁고 거침없이 '상식 밖의 속도'로 내달리는 문제작이다. 팽팽하게 긴장된 문장과 장르와 시공을 자재하게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 이야기의 근원적인 힘을 생각하게 하는 서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소설 문학의 땅을 굴착한다. 오늘보다 내일의 폭발과 섬광이 더 기대되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다음을 기약하게 된 이들에게 걸음을 멈추지 말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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