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욱 통일연구원장

남북 관계는 '구조'의 문제인가 '의도'의 문제인가? 두 상반된 시각은 대북 정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며, 대북 정책의 수단을 둘러싼 남남 갈등의 뿌리이다. 남북 관계를 구조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의하면 남북 관계 개선의 최대 장애물은 한반도 냉전 구조다. 냉전 구조의 핵심은 미국과 북한의 적대 관계이며 이러한 환경하에서 북한의 고립과 핵무기 개발은 지속될 뿐이다. 따라서 구조론에 의하면 한국과 미국이 먼저 선의를 갖고 북한이 안심하고 변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즉, 평화 체제가 구축되고 남북 경협이 증가할수록 북한이 변하고 남북 관계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반면, 남북 관계를 의도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의하면 미소 냉전이 해체된 후에도 남북 화해 협력이 지연되는 것은 북한이 적대 관계를 해소할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권 유지를 위해 고립을 자초하고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남북 경협의 확대가 자칫 북한 독재 체제를 안정시키고 핵무기 개발을 돕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 중요한 것은 대북 억지력 강화이며 기다리는 것도 유의미한 전략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구조·의도 논쟁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은 지난 12일 남북 차관급 회담 결렬에 대한 책임론 공방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서는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등 선결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원칙론과 선결 조건 없이도 관광 재개에 합의하는 유연성을 보였어야 했다는 주장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연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금강산 관광 재개가 한국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으며, 실리 면에서도 손해가 아니라고 한다. 무엇보다 북한의 시장화라는 호재를 살려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다.

원칙론에도 타당한 근거가 있다. 대북 현금 유입이 핵개발에 전용될 우려가 여전하며 미국의 대북 금융 제재 강화 움직임에도 배치되는 상황이므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금강산 관광 재개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 없는 남북 경협의 확대가 최근 두드러졌던 북한의 시장화를 오히려 후퇴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과거 남북 관계는 포용과 압박, 유연성과 원칙이 교차하면서 진전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 배경에는 구조론과 의도론의 이분법 시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분법적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

사실 이번 차관급 회담을 가능하게 한 8·25 합의는 북한의 도발에 단호한 응징 의지를 과시하면서도 대화를 통해 대결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유연성을 발휘한 결과다. 이후 10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핵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다룬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는 대북 적대시 정책이 없음을 미국이 처음 문서로 확인해준 것이다.

남북 관계 경색이 장기화되면서 유연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의 선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과 단기적 성과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그 요구에 응하는 것은 유연성이 아니라 무책임한 양보다. 유연성은 뚜렷한 정책 목표를 향한 일관성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상황 변화에 대한 치열한 분석과 고심 끝에 나오는 결단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