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 할머니 첫 피해 증언… 24년간 기나긴 싸움

조선일보
  • 정시행 기자
    입력 2015.12.29 03:00

    [12·28 '위안부 타결']

    - 롤러코스터 탄 위안부 협상
    YS정부때 고노담화 등 진전… 日우익 반대운동에 뒷걸음질
    MB정부땐 타결 직전 백지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1년 8월 고(故) 김학순(당시 67세)씨가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를 통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하면서다. 17세 때 일본군에 끌려간 그는 '일본군은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 발표를 듣고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기로 했다. 그 뒤 기자회견도 가졌으며 피해자 200여명의 증언이 잇따랐다.

    이듬해 일본 가토 관방장관이 실태 조사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처음 인정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피해자에 대한 금전 보상은 우리 몫, 일본은 진상 규명'이라는 기본 입장을 밝혔다. 이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고노 담화(1993년)가 나왔다. 일본 교과서에 위안부 사실이 처음으로 기술되고, 관련 기금이 창설된 것도 이때다.

    그러나 1997년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일본 우익 단체들이 위안부에 대한 인정을 '자학(自虐) 사관'으로 규정하고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뒷걸음질했다. 이들은 1965년 한·일 수교 협정 당시 '양국 국민 간 재산과 권리 문제는 해결됐다'는 조항을 들어 위안부 관련 배상도 더 거론해선 안 된다는 논리를 들었다.

    국내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2007년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일본에 위안부 관련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2008년 유엔 인권위도 '책임을 인정하라'며 일본을 압박했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2011년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한·일 양국이 가장 가깝게 의견 접근한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2012년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와 주한 일본 대사의 피해자 면담과 직접 사과, 피해자 배상 등의 내용을 담은 '사사에(佐佐江)안'과 '사이토(齋藤)안'이 나왔다. 그러나 일본 정권이 아베 신조 총리의 자민당 정부로 넘어가면서 이 안들은 백지화됐다. 그러나 미국 각지에서 위안부 기림비·소녀상 등이 세워지면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여성 인권' 이슈로 확산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2014년 4월부터 한·일 국장급 협의가 처음 가동된 지 1년 8개월 만에 위안부 협상이 28일 일단 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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